스토리박스

허겁지겁 해외로 망명한 前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국부(國父)와 호색한(好色漢) 두 얼굴의 소유자

↑ 후안 카를로스 1세(왼쪽)와 프랑코 총통 (1971년)

 

by 김지지

 

국왕 즉위는 프랑코 총통이 후계자로 지명한 덕분

후안 카를로스 1세(1938~ ) 전 스페인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거액을 받은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르자 2020년 8월 초 해외로 망명했다. 스페인의 일부 언론은 그가 카리브해의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망명했다고 보도했으나 며칠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의 5성급 호텔의 한 층을 통째로 빌려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1975년 국왕으로 즉위한 후 오랫동안 국부(國父)로 추앙받은 그가 무슨 연유로 허겁지겁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것일까. 카를로스 1세에 대해 알아본다.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

 

카를로스 1세가 37세 나이로 국왕에 오른 것은 36년 동안 스페인을 철권통치해온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가 죽고 이틀이 지난 1975년 11월 22일이었다. 카를로스 1세의 전임 국왕은 할아버지이자 무너진 왕정의 마지막 왕이었던 알폰소 13세였다. 그는 1931년 왕정이 무너지고 제2공화정이 들어서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가 이탈리아 로마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복권운동을 펼치는 동안 프랑코는 스페인 내전(1936~1939)의 승자가 되어 1인 지배체제를 확고히 했다. 내전 후 프랑코는 알폰소 13세를 복위시키려 했으나 국왕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1941년 로마에서 생을 마쳤다. 알폰소 13세 사후, 군주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알폰소 13세의 아들인 바르셀로나 백작 돈 후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반 프랑코 입장을 취하자 프랑코는 돈 후안 대신 아들 후안 카를로스를 미래의 스페인 왕으로 선택했다. 다만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국왕이 될 수는 없었다.

 

스페인 국민, 44년 만에 부활한 새 국왕의 등장을 반기면서도 불안한 기색 떨치지 못해

카를로스 1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나 스위스. 포르투갈 등지에서 살다가 10살 때인 1948년 프랑코의 설득으로 아버지와 함께 스페인 땅을 밟았다. 고국에서의 일과는 후계교육을 시키려는 프랑코의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1955년 육사에 입학하고 마드리드대학에서 공부하며 프랑코의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1962년 프랑코의 뜻에 따라 그리스 소피아 공주와 결혼하고 1969년 7월 프랑코의 사후 공식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국왕 즉위식

 

그가 1975년 11월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국민은 왕정이 무너진 지 44년 만에 부활한 새 국왕의 등장을 반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프랑코가 촘촘하게 쳐놓은 구질서를 들어내고 신질서를 세울 의지와 용기가 젊은 국왕에게 있는지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구질서를 수호하려는 친프랑코 군부 세력은 여전히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카를로스의 즉위도 프랑코의 절대적인 신임과 지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카를로스 1세가 어떤 노선을 추구할지가 불분명했던 것이다.

프랑코 체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자유화·민주화의 길을 선택할 것인지, 바야흐로 스페인 앞에는 갈림길이 놓여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로스는 곧 전개될 정파 간의 정치적 소용돌이를 무난하게 해결하고 국가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줄 신질서 확립을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로 인식했다.

 

쿠테타 세력들에게 “내 시체를 넘고 가라”고 일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시대 마지막 총리를 지낸 아리아스 나바로에게 새 정부를 구성하도록 했으나 나바로 내각이 좌우 화합은커녕 오히려 대립만 증폭시키자 1976년 7월 젊고 능력 있는 민주중도연합의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임명했다.

아돌포 수아레스 총리

 

수아레스는 국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41년 만에 치러진 1977년 6월의 민주 선거를 통해 새 의회를 구성하고 1978년 신헌법을 통과시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준비를 했다. 한편으로는 정치범 석방, 공안 재판부 폐지, 바스크·카탈루냐 지방의 부분적 자치 허용 등의 조치를 취하며 점진적으로 민주화를 추진했다. 공산당까지 합법화해 좌우공존을 가능케 하는 화합의 장을 마련했다.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착근될 무렵, 카를로스에게 시련이 닥쳤다. 1981년 2월 23일 오후5시, 무장한 300여 명의 경찰과 민병들이 국회로 난입, 각료와 340여 명의 의원을 인질로 삼고 의사당을 점거한 것이다. 곧 한 중령이 국회의장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면서 “쿠데타가 성공했다. 발렌시아군구(軍區) 사령관 보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군사정권이 수립됐다”고 선언했다.

비슷한 시각, 보쉬 장군은 자신의 관할 구역 내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바르셀로나에 병력을 출동시켜 주요 시설들을 점거했다. 육군 참모차장은 국왕을 찾아가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와 지방분권주의 및 정쟁 등이 스페인의 안보와 독립을 위협한다”며 “국왕이 국회의사당으로 가 군부의 군사평의회 구성에 지지성명을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국왕은 왕궁을 찾아온 쿠테타 세력들에게 “내 시체를 넘고 가라”고 일갈하며 그들의 계획에 동참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는 2월 24일 새벽 1시15분, 군복 차림으로 TV에 등장해 “폭력으로 민주과정을 방해하려는 자들의 행위와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며 단호한 입장을 밝혔다. 이에 고무된 수백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기세등등하던 군부 쿠데타는 풍선처럼 터져버렸다. 난입 민병대원들이 하나둘 투항하자 국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주의 만세” “국왕 만세”를 외쳤다.

군복 차림으로 TV에 등장한 카를로스 1세

 

민주화·자유화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랑코주의 역사의 유물로 바꿔

중대 고비를 넘긴 카를로스가 민주화와 자유화에 박차를 가한 결과, 1982년 10월 총선에서는 스페인의 전통적 좌익정당인 사회노동당이 승리했다. 1936년 프랑코의 쿠데타가 있기 전 정권을 잡았던 사회주의자들이 46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이다. 그러자 또다시 군부 쿠데타설이 나돌았다. 국왕은 연설을 통해 “군부는 현 정권의 전복을 기도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등 끊임없이 군부를 견제했다.

사회노동당은 당헌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삭제하는 등의 변화를 추구해 4회 연속 집권했다. 집권 기간 유럽연합과 나토에 가입하고 1992년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도 치러냈다. 1996년 국민당이, 2004년 사회노동당이 번갈아 승리함으로써 우에서 좌로, 다시 좌에서 우로 오가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완성되었다. 더불어 오랜 독재체제가 낳은 병폐도 민주주의 속으로 녹아들어 가면서 마르크스주의도 프랑코주의도 모두 역사의 유물이 되었다.

좌우 양당의 정치노선은 달랐지만 실용주의적이고 40대의 젊고 유능한 총리가 주도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사회노동당에서는 펠리페 곤살레스, 국민당에서는 호세 로페스가 총리 역을 충실히 수행했다. 이 모두가 든든히 뒤를 받쳐준 카를로스의 탕평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를로스는 서민적 생활 태도로도 국민의 호감을 샀다. 1년에 3만 번 이상 악수하는 등 집무시간의 가장 많은 부분을 국민과의 면담으로 채웠다. 이런 그에게 ‘국부(國父)’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거액의 뒷돈 챙기고 호색한·엽색꾼으로 살았던 두 얼굴의 소유자

놀라운 것은 국민의 존경을 받아온 그가 부정한 방법으로 거액의 뒷돈을 챙기고 호색한·엽색꾼으로 살았던 두 얼굴의 소유자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육체적 쾌락주의는 오랫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심지어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빈에게도 수작을 걸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낸 여성은 아내인 소피아 왕비라는 농담도 있다. 1975년 37세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이후 40여 년 동안 향락 행위를 즐기며 왕비와는 거의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이애나와 카를로스(1987년)

 

그가 망명하자 현지 언론은 그에 관한 성추문을 쏟아냈다. 한 언론은 그가 상대한 성관계 여성만 5000여 명에 이른다고 폭로했다. 스페인의 한 역사학자에 따르면, 20대 초반 육군사관학교에 다녔던 짧은 동안에만 여성 332명과 관계를 맺었다. 일주일에 4명꼴이었다. 한창 젊은 시절인 1976~1994년엔 여성 2154명을 농락했다. 67~76세가 된 2005~2014년에도 여성 191명을 애인으로 뒀다. 그 역사학자는 그에게 ‘왕실의 종마(種馬)’ ‘성 약탈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공교롭게도 호색한·엽색꾼의 전설 속 인물인 ‘돈 후안’은 그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했다.

카를로스는 기업인들로부터 거액의 뒷돈을 챙겨 호화 생활도 했다. 스페인 국민이 이런 그에게 분노하기 시작한 건 2012년이었다. 당시는 남유럽 재정 위기로 국민이 궁핍하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그는 독일인 내연녀와 함께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코끼리 사냥을 갔다가 국민의 비난을 샀다. 남몰래 호화 생활을 했던 또다른 행적까지 드러나 물의를 빚자 2014년 6월 아들 펠리페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펠리페 국왕

 

2018년에는 재위 기간 횡령과 돈세탁을 한 혐의로 고발되었다. 국민의 공분은 스페인 기업이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메디나 고속철도 건설 과정에서 국왕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8000만유로(약 1035억원)를 받아 스위스 비밀계좌에 넣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증폭되었다. 여론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펠리페 국왕은 2020년 3월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포기한다고 선언하고 아버지에 대한 연금 지급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여론이 악화되는 가운데 2020년 6월 스페인 대법원이 카를로스의 수뢰 혐의에 대해 검찰에 수사 개시를 명령하자 후안 카를로스는 결국 해외 도피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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