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 체코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 팔지 않았다면 승리 쉽지 않았을 것

↑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는 체코군단

 

by 김지지

 

올해는 봉오동전투(6월)와 청산리전투(10월) 승리 100주년이다. 승전의 원동력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김좌진·홍범도의 탁월한 지도력과 작전, 일본군의 오판 그리고 독립군의 무기다. 이 가운데 최근 부각되는 것이 독립군의 우수한 화력이다. ‘독립군과 무기’의 저자 박환 교수에 따르면 1920년쯤 봉오동전투 승리의 주역인 북로군독부는 소총 900정, 폭탄 100개, 권총 200정에 기관총도 2대나 갖추고 있었다. 소총은 러시아제 모신나강, 일본제 아리사카 30·38식, 독일제 마우저 등이었고, 권총은 벨기에제 나강, 독일제 마우저와 루거 P08, 장총은 오스트리아제 슈타이어 M95, 기관총은 러시아제 PM1910 맥심, 수류탄은 영국제 밀스 제품이다.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가 일어나기 1년 전만 해도 변변한 무기 하나 갖추지 않고 있던 독립군 부대가 어떻게 1년만에 이처럼 성능 좋은 무기들을 보유하게 된 것일까. 그 과정을 살펴보려면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모신나강 소총

 

봉오동전투·청산리전투 승리의 원동력은 탁월한 지도력과 독립군의 무기

레닌과 볼셰비키가 러시아 10월혁명을 성공시킨 것은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1월이었다. 문제는 러시아가 1차대전의 중요 당사자이고 따라서 전쟁을 지속하는 한 권력 장악과 혁명 안착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자칫 했다간 “볼셰비키 타도”를 외치고 있는 반혁명 반볼셰비키 세력에 다시 권력과 영토를 내주어야 할 판이었다. 볼셰비키로서는 적국이든 동맹국이든 가리지 않고 타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1차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동맹국을,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3국이 연합국을 이뤄 맞붙은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결국 볼셰비키는 적국인 독일과 전쟁을 끝내기로 했다. 그 댓가로 1918년 3월 독일과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 영토와 인구의 4분의 1, 공업·광물·농산물의 3분의 1을 독일에 내주기로 했다. 독일과 한창 전쟁 중이던 연합국은 러시아의 결정에 분노했다.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과 대치하고 있는 독일군이 서부전선으로 대거 투입될 것이 뻔한 데다 러시아혁명이 연합국에까지 미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만나 러시아의 볼셰비키 정권에 대해 군사적으로 간섭하기로 했다. 양국 군대는 흑해를 통과해 각각 우크라이나와 자카프카지예를 침공했다. 영국군 일부는 북러시아의 무르만스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 반러시아혁명 전쟁을 전개했다.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을 위해 회담 중인 양국 대표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일본에도 군대를 시베리아로 파병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반러시아혁명 연합군이 동쪽과 서쪽에서 소비에트 정부를 협공, 혁명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미국은 “정당하지 않다”며 파병을 주저한 반면 일본은 파병에 적극적이었다.

 

체코군단, 서부전선으로 가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파병을 주저하던 미국에 참전 명분을 준 것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하 체코군단)의 반란이었다. 체코군단은 1914년 1차대전이 터졌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징집된 군인이다. 체코는 중세 때 보헤미아 왕국으로 융성했던 나라였으나 신·구교 간에 벌어진 이른바 ‘30년 전쟁’(1618~1648년)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오스트리아 제국을 지배하는 합스부르크 왕조는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합,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제국의 범위를 확장했다. 당시 체코를 이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지역은 헝가리의 영토였다.

체코군단은 1차대전 개전 후 그들을 식민 통치하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일원으로 동부전선에서 러시아를 상대로 싸우다가 산발적으로 러시아에 투항, 역으로 대 독일전에 투입되었다. 그들은 독일·오스트리아의 패전이 곧 체코의 독립을 의미했기 때문에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던 중 1918년 3월 러시아와 독일이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자 난처해졌다. 독일을 상대로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게된 그들에게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 토마스 마사리크가 “목숨을 잘 보전해 서부전선으로 가라”는 지침을 내렸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도 프랑스 측과 협의해 4만 5,000여 명의 체코군단을 프랑스군에 배속시키기로 했다.

러시아군 소속 체코군단은 자체 무장력을 바탕으로 독자 부대를 조직한 뒤 서부전선으로 가서 계속 싸울 방법을 찾았다. 처음에는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통해 서방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이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 지역을 거쳐 군대와 선박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 중인 러시아 중심지를 거쳐 북부 항구로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서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막혀 있어 이들의 선택은 ‘동쪽’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체코 군단

 

체코군단, 러시아가 무장해제 요구하자 반란 일으켜

결국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인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비교적 전투가 덜 격렬한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의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그곳에서 인도양을 지나 수에즈운하를 통과하거나 태평양을 횡단해 파나마운하를 거쳐 서부전선으로 갈 생각이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이었다. 이들은 이동 수단인 열차 수백 량을 구해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 일용품을 싣고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관통해 러시아의 동쪽 끝, 태평양을 향했다.

그런데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고 있던 1918년 5월 14일 체코군단과 독일·오스트리아 포로들이 시베리아의 첼랴빈스크 철도에서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는 독일군 편을 들며 체코군단에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러자 체코군단은 소비에트 정부가 자신들을 오스트리아로 인도할 것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켰다. 미국이 블라디보스토크로 파병한 것은 이 체코군단의 유럽행을 돕기 위해서였다.

체코군단은 베리아와 우랄의 대부분과 볼가강 연안의 도시까지 점령했다. 그리고 1918년 7월 6일 마침내 동쪽 바다에 도착했다. 그동안 분산적이던 러시아 내 반러시아혁명 세력들도 하나로 뭉쳐 러시아혁명 정권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반러시아혁명 연합군도 1918년 8월부터 블라디보스토크항에 속속 상륙했다. 9,000여 명의 미군을 비롯해 영국 6,000명, 중국 2,000명, 이탈리아 1,400명, 프랑스 1,200명의 상륙으로 블라디보스토크 거리는 각국의 군대 전시장이 되었다. 일본은 1918년 8월 2일 출병을 선언한 이래 3개월 동안 자그마치 7만 3,000명이나 상륙시켜 저의를 의심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반혁명 연합군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던 1918년 11월 1차대전이 끝이 났다.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 편을 들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하는 체코군단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전선이 아닌 막 탄생한 체코슬로바키아 민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독립군, 체코군단에 각종 금붙이 등을 주고 다량의 소총 사들여

역사적으로 전혀 교류가 없던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접촉이 이뤄진 것은 그 무렵이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가 속해 있는 러시아 연해주는 다수 조선인들의 거주지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한 체코군단의 신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지는 조선인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를 토대로 1919년 조선의 3·1 운동을 보도하며 피식민지 국가 조선에 연민을 표했다. 그들 역시 300년 동안 오스트리아의 식민 통치를 겪었던 터라 일본의 식민지 국가인 조선에 동병상련의 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럽행 배편을 이용하거나 1920년 2월 러시아 볼셰비키와 체결한 정전 협약에 따라 시베리아를 횡단해 중부 유럽에 위치한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문제는 철수에 필요한 자금이었다. 그 무렵 그들 앞에 나타난 사람들이 무기가 절실했던 조선의 독립군이었다.

1920년대 초까지 활약한 독립군인 한창걸 부대 (출처 선인)

 

독립군들은 국내외 동포들이 모아 전달한 각종 금붙이 등 현물을 제시하며 무기 구매 흥정을 벌인 끝에 체코군단으로부터 다량의 소총을 사들였다. 대부분은 러시아군의 주력 보병소총이었던 7.62㎜ 모신나강이었고 분당 5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러시아제 맥심 기관총과 박격포도 있었다. 훗날 체코슬로바키아의 골동품 시장에는 당시 한국인에게서 무기 대금으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비녀, 금반지, 비단 보자기 등이 흘러나왔고 놋요강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군과 체코군이 사용하던 모신나강 소총의 상당량이 러시아산이 아니라 미국산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당시 제정 러시아는 산업시설이 부족해 육군의 기본 무기인 모신나강 소총(M1891)을 적기에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1차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의 레밍턴사에 150만 정을,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미국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수송 문제로 47만 정만 납품했다. 혁명으로 납품을 못 하고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에 공급되었다. 5만 정은 체코 군단에 공급했는데 이중 일부가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한국 독립군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한 러시아군

 

청산리전투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이범석 장군은 회고록 ‘우둥불’에서 “체코군단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리며 우리에게 연민을 표시했고, 갖고 있던 무기를 우리에게 팔기로 결정했다”고 술회했다. 독립군은 목숨을 걸고 연해주와 간도 사이의 험한 산악 지대를 넘어 이 무기를 운반했다. 그리고 곧 전개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1차대전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로 통일

체코군단이 지구를 빙 돌아 귀국했을 때 전쟁은 이미 끝나고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서로 문화와 전통이 사뭇 다르긴 했으나 민족과 언어가 사실상 같아 역사상 처음 한 나라를 이뤄냈다. 미국 망명 중 대통령으로 추대된 토마시 마사리크는 대서양을 건너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체코군단을 격려하고 기차로 한반도를 종주한 뒤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돌아갔다. 체코 건국사에서 체코군단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알려주는 일화다.

토마시 마사리크

 

체코군단의 철수가 결정되자 미국도 철수를 결정,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이후 모든 반러시아혁명 연합군이 1920년 8월까지 러시아에서 철수했으나 일본만은 러시아에 계속 남아 혁명을 간섭했다. 결국은 일본도 각국의 반대에다 일본 내의 출병 반대 여론과 재정적 어려움이 겹쳐 1922년 10월 시베리아에서 철병했다. 일본군은 5년에 걸친 반러시아혁명의 시베리아 전쟁에서 약 3,500여 명이 전사하고 그 몇 배가 부상했다.

시베리아 전쟁은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래 치른 가장 오랜 전쟁이자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패배로 끝난 반러시아혁명의 진상을 국민에게는 비밀에 붙였다. 사실상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기도 했던 시베리아 전쟁에서 러시아는 8만 명 이상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 내 반혁명 전체 과정에서도 700만~80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국토 곳곳이 유린되었다. 1차대전을 비롯해 혁명과 내전, 1921~1922년의 기근까지 포함하면 1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러시아 인구는 2,500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인류가 경험한 최악의 참사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는 일본군 그림. 서양인들까지 환영하는 것처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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