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백선엽은 국군 역사상 첫 대장이자 6·25 전쟁의 영웅… 그러나 일제 말기 간도특설대 장교 복무를 이유로 친일파로 몰리고 대한민국 지켜낸 군인의 삶까지 부정당해

↑ 백선엽 제1사단장이 평양 입성 후 미 공군장교와 작전을 논의하고 있다.(1950.10.19)

 

by 김지지

 

과거 정부 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하기로 했던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묏자리가 국립대전현충원 묘역으로 변경될 상황에 놓였다. 언론은 백 장군의 안장지 변경은 최근 여권에서 친일 행적자 국립묘지 안장을 금지하는 국립묘지법 개정 추진과도 무관치 않다고 분석했다. 그러자 대한민국재향군인회(향군)가 “창군 원로들을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대한민국 국군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향군은 “백선엽 장군은 창군 멤버로서 6·25 전쟁 시 최악의 전투로 알려진 낙동강 방어선상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며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평양 탈환 작전을 성공시킨 국내·외 공인 전쟁 영웅”이라며 했다. (※백선엽 장군은 이 글이 게재되고 1개월 보름 정도 지난 7월 10일 숨져 결국 국립서울현충원이 아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창군의 초석이자 육군 최초의 ‘리베로’ 지휘관

백선엽(1920~2020)의 삶은 대한민국 국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그는 대한민국 창군의 초석이었고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을 지켜낸 ‘다부동 전투’의 영웅이었으며 군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부름에 응한 육군 최초의 ‘리베로’ 지휘관이었다.

백선엽은 평북 강서군에서 태어나 평양사범(1939.3)과 일본군이 운영하는 만주의 2년제 봉천군관학교(1941.12)를 졸업했다. 만주군 소위로 임관해서는 1943년 2월 함경북도와 접해 있는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던 간도특설대에 배치되었다. 주둔지는 연길현 명월대였다. 일부 간부만 일본군이고 대부분의 군관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해방 후 국군 장성을 다수 배출한 부대로도 유명했다. 6·25전쟁 중 제1군단장으로 용전한 김백일 장군, ‘한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 장군, 정일권 전 국무총리도 이 부대 출신이다.

평양사범 시절.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백선엽이다.

 

하지만 백선엽은 이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했던 이력 때문에 국내 일부 정치인이나 사회단체들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난을 사고 있다. 간도특설대가 간도 일대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던 조선인과 중국 팔로군을 토벌한 일본군 특수부대였기 때문이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조선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조선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 때문에)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라며 독립군 토벌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 등은 이같은 내용 등을 토대로 백선엽을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시켰다.

백선엽은 이에 대해 2019년 6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엔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간도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버리고 없을 때였다”며 “독립군과 전투행위를 한 사실이 전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런데도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근무 시절 조선인 항일 독립군과의 전투가 있었던 것처럼 기술한 것에 대해 “1930년대 간도특설대 초기의 피할 수 없었던 동족 간의 전투와 희생 사례에 대해 같은 조선인으로서의 가슴 아픈 소회를 밝혔던 것”이라고 했다.

일본 언론에 화보로 게재된 간도특설대 모습(1943.1)

 

백선엽은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꼬박 한 달을 걸어 평양에 당도했다. 훗날 육군 중장이 될 동생 백인엽도 일본 유학 중 학병으로 일본에서 복무하다가 9월 초 평양에 와 있었다. 백선엽은 평양에서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도왔으나 소련군이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감금하자 1945년 12월 38선을 넘어 서울로 내려왔다. 백선엽은 미 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1기)를 거쳐 1946년 2월 중위로 임관해 막 창설된 부산의 제5연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승진의 급행열차를 탔다. 2월 A중대장, 9월 1대대장을 거쳐 1947년 1월에는 중령 진급과 동시에 제5연대장으로 부임했다. 1947년 12월 부산 주둔 제3여단의 참모장을 지냈으며 1948년 4월 통위부(현 국방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정보처장으로 발령받아 서울로 상경, 군대 내 좌익 숙군 작업도 지휘했다. 그때 만난 인물 중 한 명이 박정희 소령이다.

백선엽 저서 ‘군과 나’

 

박정희 소령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줘

박정희는 남로당에 가입한 사실이 밝혀져 1948년 11월 숙군팀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군대 내 남로당 조직원들의 이름을 하나둘 털어놓았다. 덕분에 전모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숙군 수사팀은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백선엽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1949년 초 어느 날 육사 동기이자 방첩과장이던 김안일 소령을 통해 백선엽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백선엽은 여수 14연대 반란군 토벌사령부로 잠시 파견되었을 때 박정희 소령을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업무를 함께 하지 않아 잘은 모르고 있었다. 면담 자리에서 박정희는 “살려 달라”고 백선엽에게 구명을 요청했다. 백선엽은 “도와주겠다”며 박정희를 안심시켰다.

백선엽은 박정희가 풀려날 만한 이유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서 중요 직책을 맡은 것은 분명하지만 정보국의 조사 결과 그가 다른 군인들을 포섭하고 조직에 끌어들였던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그가 군대 내부에서 남로당을 조직하고 포섭 활동을 한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정희는 수사를 받는 동안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를 풀어주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백선엽은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얻고 미군의 양해도 얻었다. 또한 박정희를 직접 수사한 김안일 소령과 김창룡 대위를 불러 자신이 서명한 박정희 구명 사유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는 1949년 1월 말 풀려났고 1949년 2월 중순 고등군법회의에서 무기징역과 파면을 선고받았다. 1949년 4월 중순에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을 면죄받는 파격적인 특례를 받아 자유의 몸이 되었다. 게다가 백선엽 국장의 도움으로 비공식 문관 자격으로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으로 발령받는 특전까지 누렸다.

1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백선엽 대장(가장 왼쪽)이 5사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 준장(왼쪽 세번째) 등 예하 사단장의 보직신고를 받고 있다.

 

육군 참모총장 두 번 역임한 대한민국 최초 대장

백선엽 대령은 광주 주둔 제5사단장을 거쳐 1950년 4월 서부전선 최일선을 담당하는 제1사단장으로 부임했다. 2개월 뒤 6·25가 터졌을 때 백선엽은 3일 동안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 1사단이 적에 포위되자 행주나루에서 한강을 도하해 부대를 온전하게 유지했다. 백선엽은 이 전공을 인정받아 개전 1개월 뒤 준장으로 진급했다.

‘다부동 전투’는 백선엽이 제1사단을 이끌고 무공을 과시한 대표적인 전투였다. 치열한 공방 속에서 미군의 화공과 1사단이 중심이 된 우리 군의 배수진 전술로 다부동 전투는 우리 군의 승리로 끝나 북진을 위한 돌파구 역할을 했다. 백선엽은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최대 격전인 다부동 전투에서 8000명의 병력으로 북한군 2만여명의 총공세를 한 달 이상 막아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이 도망치려 하자 백 장군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나라가 망하기 직전이다. 저 사람들(미군)은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이럴 순 없다. 내가 앞장설 테니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쏴도 좋다”며 장병들을 독려했다. 1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 1기병사단, 24보병사단 등과 치열한 북진 경쟁을 벌였다. 결국 백 장군의 1사단이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영예를 차지했다. 이후 1사단은 청천강을 넘어 평북 운산까지 진출했으나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경기도 안성까지 후퇴했다가 1951년 3월 15일 서울을 재탈환할 때 가장 먼저 한강 도하작전을 감행했다.

백선엽은 1951년 4월 소장으로 진급,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는 국군 제1군단장으로 발령받아 동해안 쪽의 북진을 선도했다. 1951년 7월 시작된 휴전회담의 한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그해 11월 창설된 ‘백(白)야전전투사령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1군단장으로 복귀한 1952년 1월 중장으로 진급하고 같은 해 4월 새로 창설된 제2군단장으로 부임해 중부전선을 담당했다. 1952년 7월 23일 육군 참모총장에 오르고 1953년 1월 13일 33살의 나이로 국군 최초의 대장으로 진급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육군 대장 백선엽 장군

 

백선엽은 최고위직인 대장이 되고도 군의 ‘리베로’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1954년 2월 155마일 전선을 담당하는 제1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었을 때는 육군 참모총장 직에서 물러나 초대 사령관으로 3년 9개월동안 야전군을 키우다 1957년 5월 육군 참모총장으로 복귀했다.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을 2년간 맡고 연합참모본부 의장으로 1년 남짓 근무하다가 1960년 5월 31일 군복을 벗었다. 당시 그의 나이 만 39세였다.

이후 백선엽은 중화민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말년에는 주로 공기업 사장을 역임하다가 은퇴했다. 그가 조국에서 받은 훈장은 태극무공훈장 2회를 비롯, 모두 6회나 되고 미국의 각급 훈장 7회를 포함해 우방 11개국의 훈장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 코드에 맞추느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한국군보다 미군이 백선엽을 ‘살아 있는 전설(Living Legend)’이라며 더 극진히 예우한다는 점이다. 역대 주한미군사령관들은 이취임식에서 한국군 관계자들을 언급할 때 백선엽을 가장 먼저 호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주한미군은 2013년 그를 ‘명예 미 8군사령관’으로 위촉해 각종 공식행사 때 주한 미 8군사령관과 같은 예우를 해왔다. 2019년 11월에는 로버트 에이브럼스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은 마이클 빌스 미 8군사령관 함께 한국 나이로 100세 생일을 맞은 백 장군을 찾아 축하 인사를 했다.

2019년 11월 로버스 에이브럼스 주한미군사령관과 마이클 빌스 미 8군사령관이 100세 생일을 맞은 백선엽 장군을 방문해 셀카를 찍고 있다. (출처 주한미군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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