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김영삼·김대중·이철승의 ‘40대 기수론’에, 신민당(야당)의 제1파벌 보스가 “구상유취(口尙乳臭)한 노릇”이라며 일축했으나 김대중 극적인 반전 드라마에 성공

↑ 경선 후 승리한 김대중(오른쪽)에게 김영삼이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다.

 

by 김지지

 

2020년 4·15 총선에서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참패하자 40대를 전면에 세워 세대교체를 해야 한다는 이른바 ‘40대 기수론’이 관심을 끌고 있다. 우리 정치사에서 ‘40대 기수론’이 처음 등장한 건 50년 전. 대통령선거를 앞둔 1969~1970년 야당인 신민당에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등 40대가 연이어 대통령출마를 선언함으로써 40대 기수론에 불을 지폈다.

물론 50년 전 40대와 지금의 40대는 생리학적으로나 연륜으로나 확연히 다르다. 당시는 60살이면 노인이었다. 1960~70년대 TBC(동양방송)의 유명 TV 프로그램 ‘장수무대’에도 60세면 출연할 수 있었다. 따라서 70은 넘어야 노인 대접을 받는 요즘을 기준 하면 당시 40대는 지금의 최소한 50대 이상이다.  또한 당시 40대는 지금의 40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륜이 쌓이고 사회적으로도 기둥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50년 전 ‘40대 기수론’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오고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당시의 정치 상황을 살펴본다.

 

“대통령후보가 40대라야 한다는 얘기는 구상유취한 노릇”(유진산)

박정희 정권이 1969년 9월, 3선 개헌안을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킨 후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가 다가오고 있었으나 야당인 신민당은 깊은 좌절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1963년과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한 윤보선의 인기도 한풀 꺾인 상태였다. 기대를 모았던 유진오 총재마저 3선 개헌 과정에서 병을 얻어 요양 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69년 11월 8일 김영삼 신민당 총무(42세)가 “빈사 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키는 데 앞장서겠다”며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신민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입후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의 시작이었다. 40대 기수론은 3선 개헌으로 좌절감에 빠져 있던 국민에게는 참신한 인상을 심어주고 좌절과 허탈 상태에 빠진 신민당에는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수석 부총재에 제1파벌의 보스였던 당내 2인자 유진산에게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선언이었다. 그는 자파 내 젊은 실력자인 김영삼 총무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출마선언을 하자 “대통령후보가 40대라야 한다는 얘기는 구상유취(口尙乳臭·젖비린내 나는 애숭이)한 노릇”이라며 ‘40대 기수론’을 일축하고는 자파 당원들에게 김영삼의 후보지명 운동에 동조하지 말도록 엄명을 내렸다. 이재형 등 다른 파벌의 노장층도 유진산과 보조를 맞췄다. 김영삼의 후원자는 몇몇 소장의원 뿐이었다.

김영삼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세대교체의 여론을 조성하고 있을 때 당내 기류를 주시하고 있던 김대중(45세)도 1969년 11월 18일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음을 내비쳤다. 김대중은 1970년 1월 24일 후보 지명전에 출마하겠다고 정식 선언하면서 “절망을 모르는 시지프스의 신처럼 최후의 승리를 위해 싸워나갈 것”이라며 “싸우다 쓰러지는 무명의 투사가 될망정 이익을 위해 사술만 농하는 마키아벨리는 되지 않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맹렬한 기세로 지명대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철승(48세)도 1970년 2월 12일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이철승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해외를 떠돌다 1969년 귀국해 전당대회 4일 전에 입당한 상태였다. 이후 세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다짐하며 단일화가 안 될 경우 지명대회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겠다고 명문으로 약속했다.

왼쪽부터 이철승, 김대중, 김영삼

 

유진산의 추천으로 대세가 김영삼 쪽으로 기울어

그런 상황에서 1970년 1월 26일 치러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유진산, 이재형, 정일형 3인이 당수자리를 놓고 2차 투표까지 가는 격전을 벌인 끝에 유진산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문제는 유진산의 사쿠라 이미지가 너무 강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 정치에서 사쿠라는 뒤에서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뜻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박 정권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이던 1970년 8월 유진산이 베트남, 필리핀, 일본 등 해외를 순방할 때 유진산의 이미지를 띄우기 위해 막후에서 도움을 주었다.

유진산

 

유진산은 귀국 후 자신도 후보 경쟁 의사가 있음을 밝혔는데 이는 해외순방 전 본인의 공언을 뒤집은 것이었다. 그동안 유진산은 1970년 3월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그 후에도 불출마 의사를 여러 차례 표명했었다. 그러나 해외순방 후 유진산은 “후보에 나서지 않겠다고 공언했다고 해서 후보가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며 정치는 유동적”이라는 논리를 펴며 과거의 태도를 바꿨다.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 대회가 열리기 꼭 한 달 전인 8월 29일 유진산과 여야 영수회담을 가짐으로써 유진산을 야당의 대표 지도자로 인식시켰다.

유진산은 “야당의 질서를 파괴할 40대 후보의 등장은 막아야 한다”면서도 대통령후보 출마 결심은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상황변화를 주시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출마에 대해 찬성보다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후퇴를 결심했다. 단 무조건 후퇴가 아니라 후보 지명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김영삼과 이철승은 유진산의 제안을 수락했으나 김대중은 거부했다. 유진산과 항상 계보를 달리 해온 김대중으로서는 유진산이 김영삼을 추천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해 유진산의 후보 추천 제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1970년 9월, 유진산 신민당 총재가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세 사람과 고흥문 사무총장을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신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중, 유진산, 고흥문, 이철승, 김영삼

 

김대중, 포기하지 않고 밤 늦도록 대의원 찾아가 지지 호소

유진산은 예상대로 지명대회 전날인 1970년 9월 28일 “당수로서 김영삼 의원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추천한다”고 발표했다. 게다가 당내 제2파벌인 이재형계마저 김영삼을 지지하고 이철승도 유진산이 추천하면 지명대회와 대통령선거에서 성의를 다해 협조하겠다고 서약함으로써 대세는 사실상 김영삼 쪽으로 기우는 듯 했다. 대의원 40%를 확보하고 있던 범 유진산계와 제2계파였던 이재형계, 심지어 경쟁자였던 이철승계로부터도 지원을 약속받고 비주류 측에서도 속속 김영삼 지지를 약속하며 당직 배분 문제를 제의해온 터라 김영삼은 미리 후보 수락 연설문까지 준비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차 있었다. 전당대회라는 요식행위만 남아 있다고 생각한 김영삼 측은 대의원 표를 더 끌어모을 생각보다는 후보 지명 뒤의 축하연을 어떻게 치를 것인가에 신경을 썼다.

이 같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결코 표 대결을 포기하지 않았다. 김영삼 쪽이 느긋이 전당대회를 기다렸던 것과 달리 김대중과 아내 이희호는 전당대회 전날 밤 통행금지 직전까지 지방의 대의원들이 계파별로 묵고 있는 청진동 여관을 돌았다. 김대중 측은 유진산계 대의원들과 이철승 쪽 대의원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일일이 찾아가 큰절을 올리며 지지를 호소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신념과 달변으로 대의원들의 표심을 흔들었다. 밤이 깊어지면서 표의 동요가 일어나고 있었지만 김영삼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후보 수락 연설문을 작성하며 밤을 보냈다.

 

1차 개표 후, 김영삼은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

드디어 9월 29일 전당대회 날이 밝았다. 김대중 후보 진영은 국내 전당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대회장(서울시민회관) 벽면을 후보 얼굴이 찍힌 포스터로 채웠다. 하늘에는 대형 풍선을 띄웠다. 김대중이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참관했을 때 축제를 하듯이 대회를 치르는 것을 보고 모방한 것이다. 시민회관 주위를 메운 지지자들은 피켓을 들고 “김대중!” “김대중!”을 연호했다. 특히 신민당 원로이자 6선 의원인 정일형의 응원이 그들을 감동시켰다. 정일형이 ‘김대중 동지를 대통령으로’라고 쓴 피켓을 들고 지지자들과 함께 “대통령 김대중!”을 외쳤기 때문이다. 이후 김대중은 그런 정일형의 모습을 평생 반추했다. 반면 유진산 총재의 지원을 업어 사태를 낙관한 김영삼 측에서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대회장으로 들어갔다. 김영삼은 시민회관 2층에서 후보 지명 자축파티를 벌이기로 하고 맥주 200상자를 주문해 놓고 있었다.

김대중이 대회장에 들어가면서 대의원들에게 승리의 상징인 V자로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오전 10시 35분, 마침내 개회가 선포되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서로 얼싸안고 선의의 경쟁을 약속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유진산의 지명을 받지 못한 이철승은 후보 사퇴 선언을 하고 퇴장했다. 투표 결과 총투표수 885명 가운데 김영삼 421, 김대중 382, 무효 82표(백지 78, 기타 4)로 집계되었다. 무효표는 이철승 지지자들이 단체로 던진 백지투표였다. 전당대회장은 뜻밖의 결과에 술렁거렸다. 과반수 획득에 실패한 김영삼은 그제야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1위와 2위를 놓고 2차 투표를 위해 정회가 선포되자 김대중은 혼신의 힘을 다해 모든 조직을 가동했다. 대회장 안은 물론 복도나 계단,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대의원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지지를 호소하며 마지막까지 총력전을 펼쳤다. 정회 중 이철승의 마음을 잡는 것이 양측의 절박한 공동 관심사였으나 약속을 지키라고 막연하게 요구하는 김영삼 측과 달리 김대중 측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과반수 확보하는 역전의 드라마 연출

이철승이 대회장을 빠져나간 상태에서 김대중이 이철승계의 조연하를 구석진 곳으로 불러냈다. 조연하가 “다음 총재를 선출할 때 이철승을 지지해달라”는 이철승의 의중을 전하자 김대중은 재빨리 자신의 명함 뒷면에 ‘각서: 신민당 대통령후보에는 김대중 의원을 추천하고(지지하고) 금년 11월 정기전당대회에서는 당수로 이철승 씨를 지지하기로 상호 합의각서를 교환함. 9월 29일 김대중’이라고 쓰고는 명함을 조연하 손에 쥐어주었다. 조연하는 곧 자파 대의원들에게 김대중을 지지하라는 뜻을 전했다.

오후 3시쯤 시작된 2차 투표 결과, 총투표 884표 가운데 김대중 458, 김영삼 410, 기타 16표로 나타났다. 김대중은 과반수를 확보하고 김영삼은 표가 오히려 줄어드는 역전의 드라마가 연출된 것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김영삼조차도 충격을 감출 수 없는 결과였다. 김영삼은 자신의 패배가 훗날 이재형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과 이철승의 배신이 합쳐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당시에는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김대중은 2년 전 원내총무 지명을 받고도 김영삼계의 반대로 인준을 받지 못했을 때의 치욕을 떠올리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김대중이 대통령후보 경쟁에 뛰어들도록 자극한 것도 그때 김영삼의 반대가 계기가 되었다.

김영삼은 충격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그는 김대중의 손을 들어올린 뒤 간간이 목멘 소리로 연설을 해나갔다. “김대중의 승리는 바로 나의 승리입니다.… 김대중을 앞세우고 어디든지 함께 다닐 것을 약속합니다. 내 고향 거제에서 제주도까지, 아니 무주구천동까지라도 가서 김대중 씨의 득표를 위해 도와주겠습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몇 안 되는 감동적인 패자의 명연설이었다. 대의원들의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뒤로 한 채 김영삼은 단상에서 내려왔으나 가슴 속에는 진한 눈물이 배어 있었다.

제7대 대통령선거 포스터

 

김영삼은 제7대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그 해에 발간한 저서 ‘40대 기수론’에서 당시 그의 생각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는 해방 후 25년간 야당이 국민적 지도자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했으나, 두 번의 대선에서 조병옥·신익희 두 후보자가 병환으로 끝까지 완주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1969년 3선개헌 저지 운동 때도 유진오 신민당 총재의 병환이 실패 원인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집권당인 공화당의 중심세력이 40대로 젊은데 반해 신민당은 60대가 주축을 이루고 있어 노쇠한 정당이라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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