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잡지 ‘플레이보이(Playboy)’가 창간 67년 만에 종이 인쇄판을 중단한다는데… 내 靑春의 일부이기도 했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2020년 3월 20일 · zznz

↑ 버니걸(bunny girl)들에 둘러싸여 있는 휴 헤프너
by 김지지
미국의 유명 성인잡지 ‘플레이보이’가 “2020년 봄호가 마지막 인쇄판이 될 것”이라고 최근 밝힘으로써 67년만에 인쇄판 발행이 중단된다. 1953년부터 인쇄판을 발행한 플레이보이는 과거에도 무료 인터넷 성인물 확산과 인쇄 매체 쇠락의 영향으로 잡지 발행 중단을 논의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발행 횟수를 줄였을 뿐 발행을 중단한 것은 처음이다. 인터넷판은 계속 발행할 계획이다.
휴 헤프너, 20대부터 개인주의적이고 해방주의적 사고에 빠져
‘기혼 여성 4명 가운데 1명이 혼외정사 경험이 있다’는 킨제이의 두 번째 보고서가 1953년 9월에 공개되어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져주고 있을 때, 27살의 휴 헤프너(1926~2017)는 미국인들의 가슴 속에 웅크리고 있는 일탈에 대한 갈망을 채워줄 ‘플레이보이’지 창간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당시 미국인들의 ‘위장된 모럴’과 ‘성을 둘러싼 위선’을 풀어헤치겠다는 역발상이었다.
헤프너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청교도적 삶을 요구하는 교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엄격한 규범을 중시하는 집안의 영향을 받아 음주, 욕설, 성적 호기심을 멀리하며 성장했다. 고교 시절에는 글쓰기, 연기, 만화 같은 창조적 활동에 시간을 보내고 자신의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만화 자서전’을 시도했다. 1946년 9월 일리노이대 심리학과에 입학해서도 각종 출판물에 만화와 기사를 기고했다. 이런 헤프너에게 신선한 충격이자 자극으로 다가온 것은 1948년 발간된 킨제이의 첫 번째 보고서 ‘남성의 성적 행동양식’이었다.

헤프너는 1949년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을 한 후 남성지 ‘에스콰이어’지 등에서 글을 썼다. 그 무렵 그는 표현의 자유, 성적 자유, 개인 자유를 우선하는 개인주의적이고 해방주의적인 사고에 빠져 있었다. 헤프너의 상상은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각종 성적 일탈에 탐닉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별 죄의식 없이 젊은 부부 모임에서 옷을 벗는 게임을 하는가 하면 포르노 영화를 만들고 혼외정사와 동성애를 경험했다.

누드 사진에 관한 법적인 문제가 신경 쓰여 창간호 표지에 발간연월 표시하지 않아
헤프너가 친구와 부모에게서 빌린 8,000달러를 종잣돈 삼아 시카고에서 플레이보이를 창간한 것은 1953년 11월 첫째주였다. 창간호에서 남성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달의 스위트 하트’(2호부터는 ‘이 달의 플레이메이트’) 코너에 실린 여성의 누드 사진이었다. 헤프너가 지방의 인쇄업자로부터 500달러를 주고 구입한 사진의 주인공은 영화 ‘나이아가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헤프너와 동갑인 마릴린 먼로(1926~1962)였다. 표지에는 먼로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는 사진이, 센터폴드(가운데에 접어 넣은 페이지)에는 먼로의 관능적인 컬러 누드 사진이 실려 있었다. 남성 독자들은 난생 처음 보는 완전히 새로운 잡지의 등장에 응큼한 미소를 지었고 사회적으로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는 극렬한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보수적 분위기가 팽배하던 때였다.

헤프너는 버니(토끼)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략에 능하고 정력이 좋은 동물계의 플레이보이라는 사실에 착안, ‘버니걸’을 플레이보이지의 심벌로 삼았다. 이후 버니 로고는 성 해방과 성 상품화를 상징했다. 1971년 데뷔한 우리나라 2인조 여성 듀엣가수 ‘바니걸스’도 이의 영향을 받은 산물이다.
헤프너는 이처럼 획기적인 창간호를 발간하고도 누드 사진에 관한 법적인 문제, 독자들의 반발, 2호 발간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자신을 발행인으로 내세우지 않고 표지에 발간연월도 표시하지 않은 채 그냥 ‘1st ISSUE’라고만 표시했다. 그런데도 50센트짜리 44쪽 분량의 창간호는 단숨에 5만 4,000부가 팔려나가는 대성공을 거뒀다. 자신감을 얻은 헤프너는 12월 초에 발행된 2호에는 자신의 이름을 발행인으로 올렸다.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 심벌을 팔겠다는 발상은 획기적
헤프너는 전후 미국 사회에 나타난 두 가지의 강력한 흐름을 완벽하게 포착했다. 그것은 성적 해방과 소비의 풍요였다. 플레이보이는 이런 헤프너의 생각을 반영해 갈수록 속박을 싫어하는 사회를 향해 육체적·물질적 쾌락이 넘치는 매혹적인 꿈의 세계를 펼쳐 보였다. 매력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여자들을 등장시키고 성적 쾌락을 거침없이 부각해 물질적 풍요 속에 사는 젊은 독신 남성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중년 남성들에게는 성적 모험의 환상을 제공했다. 여성을 상품화한다는 비난이 적지 않았으나 섹스 자체가 아니라 섹스 심벌을 팔겠다는 발상은 획기적이었다.
헤프너와 플레이보이는 2차대전 후 미국 사회의 가치를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형성하는 데도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플레이보이는 점차 개인적 해방, 성적 자유, 물질적 풍요를 뼈대로 하는 미국식 가치관을 새롭게 제시하고 세계 각국에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토끼 모양의 로고는 점차 미국 문화의 국제적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플레이보이는 청교도 사상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새로운 성문화의 전파자로 확고한 지위를 굳혀나갔고, 헤프너는 먹는 피임약, 로큰롤과 함께 미국 사회의 ‘성 혁명’을 이끈 ‘개방된 성의 선구자’라는 평을 들었다.

플레이보이 제국은 클럽, 리조트, 음악, 영화, 텔레비전 쇼를 비롯해 다양한 영역으로 뻗어나갔다. TV 프로그램인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를 시작하고, 독신 생활의 자유와 풍요로운 삶을 실제로 추구할 환상의 집 ‘플레이보이 맨션’을 선보였으며 독자를 환상 속으로 끌어들이는 ‘플레이보이 클럽’을 열었다. 사업 확장과 더불어 헤프너의 인생도 완전히 바뀌었다. 잡지에 담아내기만 하던 독신 남성생활의 환상을 자신의 일상을 통해 구현함으로써 그 자신이 확실한 ‘미스터 플레이보이’가 된 것이다.

헤프너의 천부적 감각으로 눈부시게 성장
플레이보이는 한 달에 한 명씩 여성 모델의 누드 사진을 싣는 ‘이 달의 플레이메이트’로 남성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만 누드 사진이 노골적이진 않았다. 알몸으로 등장한 스타의 면면은 소피아 로렌, 브리지트 바르도, 파멜라 앤더슨, 드루 배리모어, 킴 베이싱어, 샤론 스톤, 나오미 캠벨 등 다양했다. 물론 대부분은 항공기 승무원, 전화 교환수, 여대생처럼 참신하고 건강한 평범한 젊은 여성이었다. 헤프너는 평생 동안 이 모델 중 일부 여성과 사랑을 나눴다.
마릴린 먼로는 창간호에 누드 사진이 실린 이후에도 5차례나 더 플레이보이 표지 모델이 되었으나 36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에도 이 잡지에 나왔던 다른 여성 모델들이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포착한 AP통신이 2007년 흥미로우면서도 끔찍한 통계를 보도했다. 1953년 창간부터 2007년까지 모두 600여 명의 표지 모델을 배출했는데 이 중 상당수가 약물중독·자동차 사고·비행기 사고·피살 등의 원인으로 삶을 비극적으로 마쳤다는 것이다. 이후 ‘플레이보이 표지 모델의 저주’라는 말이 생겨났다.

플레이보이는 성 모럴의 빠른 변화를 읽어낸 헤프너의 천부적인 감각이 적중한 것에 힘입어 눈부시게 성장했다. 창간 1년 만에 18만 부, 1955년 50만 부, 1959년 110만 부를 기록하고 1968년에는 550만 독자를 거느린 연간 매출 9,600만 달러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미국 출판 역사상 유례없는 대성공이었다.
“1000명이 넘는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것 같다”
헤프너는 결혼을 세 번 했다. 고교 시절부터 사귄 밀리 윌리엄스와의 첫 결혼(1949년)은 남매를 낳고 10년 만에 끝이 났다. 이후 독신으로 지내며 ‘플레이보이 맨션’으로 불리는 방 29개짜리 로스앤젤레스 대저택에서 유명인은 물론 20대 여성인 플레이메이트들과 매일밤 파티를 하며 염문을 뿌리는 것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때부터 실크 파자마를 입고 파이프 담배를 문 채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63살 때인 1989년 ‘올해의 플레이메이트’와 두 번째 결혼을 해 두 아들을 두었으나 이 역시 7년 만에 별거에 들어가 2009년 이혼했다. 86살이던 2012년에는 자신보다 60살이 어린 26살의 플레이보이 모델 크리스털 해리스와 결혼했다. 2013년 3월 남성 패션잡지 ‘에스콰이어’지와의 인터뷰에서는 “기억하긴 어렵지만 1000명이 넘는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을 것”이라고 고백하면서도 “결혼 중에는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고 해명했다.

한 번도 만나진 못했으나 먼로의 열렬한 팬이었던 그는 1992년 “먼로 옆에서 영원히 지낸다는 것은 너무 감미로운 일이어서 그냥 넘길 수 없다”며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우드 메모리얼 파크 공동묘지에 묻힌 먼로 옆 묏자리를 구입했다. 2003년에는 자신의 묘비명에 써놓을 자신의 인물평을 미리 써놨다. 2017년 숨진 후 먼로 묘지 옆에 조성된 묘비명에는 인물평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성에 대한 위선적인 생각을 바꾸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했고 또 그렇게 하는 동안 많은 재미를 본 인물로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나라에서 플레이보이는 공식적으로 금서였다. 그런데도 1990년대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 오랜 세월 ‘지하’에서 대량 유통되며 중고생부터 성인 남성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한번쯤은 볼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유지했다. 그 무렵 서울의 명동, 청계천, 청량리 등 뒷골목에선 ‘PB’(플레이보이), ‘PH’(펜트하우스)라는 은어로 불리며 미국 가격보다 몇 배나 비싸게 팔렸다. 음란서적 국내 판매책이 검거되었을 때 언론은 “마치 반공드라마에 나오는 북괴 간첩들 접선 모습 비슷하다”고 기사를 썼다.
그 시절, 공부를 잘하는 고교생 중에는 플레이보이를 보며 영어공부를 했으니 꿩 먹고 알 먹은 공부법이었던 셈이다. 어디서 구했는지 어느날 학교에 플레이보이를 가져온 고교생은 적어도 그날만큼은 친구들의 영웅 대접을 받았다.
여성을 상품으로 내걸고 양성평등을 주장한 것은 아이러니
플레이보이가 표방한 것은 ‘놀 줄 아는 지성인을 위한 잡지’였다. 플레이보이에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파격적인 기사와 문학작품을 매호 실어 잡지에 쏟아지는 고정된 편견을 거부했다. 존 스타인벡, 앨릭스 헤일리, 아서 클라크, 이언 플레밍, 헨리 밀러 등의 문학작품을 싣거나 버트런드 러셀, 알버트 슈바이처, 장 폴 사르트르, 마틴 루터 킹, 피델 카스트로, 밥 딜런, 허버트 마르쿠제, 맬컴 X, 존 레논 등 당대에 유명하거나 진보적인 인사들을 인터뷰해 결코 허리 아래만을 다루는 잡지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커트 보니것, 존 업다이크, 조이스 캐럴 오츠, 무라카미 하루키 등의 단편소설과 SF소설로도 인기를 모았고 논쟁적인 시사 기획도 늘 화제였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976년 대선 전 “수많은 여자에게 정욕을 느꼈다. 마음의 간음도 여러 차례 저질렀다”고 털어놓은 곳도 플레이보이와의 인터뷰였다.
도널드 트럼프도 플레이보이와 종종 인터뷰를 했다. 그 중 1990년 3월호에 실린 부동산 재벌 시절의 인터뷰는 트럼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플레이보이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 사업, 개인생활, 정치철학과 국제 관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트럼프의 솔직한 생각을 실었다. 정치평론가들도 트럼프를 이해하려면 이 인터뷰를 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플레이보이는 표현의 자유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검열 반대를 분명히 했다. 정치적으로는 1960년대 좌파 자유주의의 요새를 자임했다. 미국의 기본적 사회 경제 체제까지 문제 삼지는 않았으나 성생활을 포함한 개인 선택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에 서서 흑인의 인권을 옹호하고 반전운동을 펼쳤으며 마리화나와 LSD같은 기분 전환 약물의 사용을 옹호했다.
막 싹트던 페미니즘 운동까지 거들었으나 여성을 상품으로 내건 플레이보이가 여성의 자유로운 직업 선택과 양성평등 논쟁의 주축 구실을 한 것은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결국에는 1960년대 말 여성해방운동가들이 헤프너와 잡지에 이념의 조준경을 맞추고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으며, 헤프너가 여성을 비윤리적으로 착취한다고 비난했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상품화’를 비판한 세계적인 여성해방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도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를 창간하기 전에 플레이보이 클럽의 버니걸로 활약했던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펜트하우스’ ‘허슬러’의 도전과 인터넷의 확산으로 침체 가속화돼
플레이보이는 1972년 700만 부라는 최고기록을 세우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점차 아류 잡지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판매부수가 감소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1969년 9월 ‘우린 토끼 사냥을 나간다’고 창간 광고를 낸 ‘펜트하우스’였다. ‘펜트하우스’의 여성 나체 묘사는 대담했다. 미국 누드 잡지계에서 금기시하던 음모까지 드러냈다. 또 다른 도색잡지 ‘허슬러’는 노골적인 음란 사진들로 잡지를 도배했다. ‘펜트하우스’는 200만 부(1972), 400만 부(1973)로 승승장구했다. 1976년에는 450만~500만 부를 발간, 그해 500만~600만 부를 기록한 플레이보이와 호각지세를 형성했다. 1980년대는 더 어려워졌다. 에이즈로 인한 성문화의 위축, 레이건 정부로 대표되는 보수주의 확산으로 수세에 몰렸다. 1990년대 들어서는 인터넷의 급속한 보급, 넘쳐나는 포르노 사진과 영상 등으로 하향 추세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1982년 헤프너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장녀 크리스티 헤프너가 수익성 없는 사업은 매각하고 포르노 프로그램을 전문적으로 방송하는 플레이보이 채널과 스파이스 채널로 사업의 다각화를 꾀했으나 몰락의 수순을 피하지는 못했다. 315만 부(2006년), 245만 부(2009년)로 줄어든 판매부수는 2010년 150만 부로 급감했다. 급기야 2015년 80만부로 떨어지자 “클릭 한 번이면 모든 종류의 성적 이미지를 공짜로 볼 수 있게 됐다”며 2016년 3월부터 여성 누드 사진을 싣지 않는 획기적인 실험을 했으나 1년만에 이 방침을 철회해야 했다. 마지막 수순은 인쇄판 발행 중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