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과 부부 ⑥] 나혜석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해방과 성평등의 선각자였으나 세상을 역류해야 하는 고통과 상처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2020년 3월 19일 · zznz

↑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모습(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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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시대를 너무 앞질러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게 비극
날카로운 총기, 들끓는 예술혼, 사랑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모두 지닌 나혜석(羅蕙錫·1896~1948)의 비극은 시대를 너무 앞질러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1913년 3월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실이 매일신보(1913.4.1)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나혜석은 고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하이틴 스타였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7세 때인 191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함으로써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국내 4번째 서양화가가 될 자격을 갖췄다. 일본 유학은 나혜석에게 서양미술뿐만 아니라 신여성운동의 이론도 가르쳐주었다. 특히 스웨덴의 여성 사상가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와 자유 이혼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혜석은 1914년 가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3호에 실린 ‘이상적 부인’ 제목의 글에서 “현모양처론은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예고했다. 이후 그의 삶은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선구적으로 추구한 선각자의 삶이었다. 영국에 버지니아 울프가, 프랑스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면, 우리 현대 지성사에선 나혜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상처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첫사랑과의 사별, 나혜석이 겪은 비운의 시작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의 첫사랑은 오빠의 친구이자 게이오대 학생 최승구였다. 당시 최승구는 조혼으로 고향에 아내가 있었지만 나혜석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두 사람은 화가와 시인으로 서로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공명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나혜석의 아버지가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남성과의 결혼을 나혜석에게 강요하고 최승구의 집안이 나혜석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혼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승구가 폐병에 걸려 요양을 위해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돌아가자 나혜석은 1916년 4월 최승구를 병문안했다. 그러나 나혜석이 최승구와 헤어진 다음날, 최승구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 증세를 앓았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1917년 어느 날 오빠 나경석의 친구이자 교토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부산 출신의 김우영(1886~1958)이 다가왔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나이가 10살이 많았고 상처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딸도 있었다. 김우영이 애정 공세를 펼쳤으나 나혜석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당시 나혜석은 이광수와 가깝게 지냈다. 이광수는 나혜석의 친구인 허영숙과 이미 사랑하는 관계이면서도 나혜석도 놓치기 싫어 두 여자와 삼각관계를 유지했다. 더구나 이광수는 조선에 조혼한 부인까지 있었다. 결국 허영숙과 나혜석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광수는 허영숙을 선택했다. 이광수는 본처와 이혼한 뒤 1918년 10월 허영숙과 중국 베이징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였다.

사별한 부인의 자식까지 있는 김우영의 청혼 받아들여
나혜석은 1918년 3월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미술학교를 졸업하기 전, 도쿄에 유학 중인 조선 여학생들의 동인지 ‘여자계’ 창간에 동참하고 여자계 2호와 3호에 뚜렷한 여성 의식을 보여주는 단편소설 ‘경희’와 ‘회생한 손녀’를 발표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로 문학사에 이름을 올렸다. 정신여학교 미술 교사로 활동할 때는 1918년 6월 창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 단체인 ‘서화협회’ 회원으로 참여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해 5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마침내 그를 변호해준 김우영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결혼 조건은 나혜석다웠다. ▲일생을 두고 지금처럼 나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함께 살지 않을 것 ▲전 애인 최승구의 비석을 세워 줄 것 등이다. 두 사람은 이렇게 결혼 서약을 한 뒤 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말이 신혼여행이었지 전남 고흥에 있는 최승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워주기 위한 여행이었다. 김우영은 내키지 않았지만 아직 남아 있는 첫사랑과의 추억과 애정을 묻어버리고 이후 자신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한다는 데 마냥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나혜석은 최승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사진을 모두 태워 비석 밑에 묻으며 첫사랑과의 이별 의식을 치렀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겸 한국의 4번째 서양화가로 이름 올려
나혜석은 1921년 3월 19~20일 첫 여성 개인전람회를 경성일보 전시장인 내청각에서 열어 마침내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겸 한국의 4번째 서양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전시회는 매일신보가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대성황이었으며… 제2일에는 3시까지의 관람자가 무려 4,000~5,000명에 달하였더라…”라고 보도할 만큼 성황을 이뤘다. 한국 미술사에 기록된 한국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은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김관호가 1916년 12월 연 전시회이지만 장소가 평양이라는 점에서 나혜석의 개인전은 서울 최초였다.

나혜석은 1921년 7월 ‘신가정’ 창간호에 단편소설 ‘규원’을 발표하는 등 소설가로도 활동의 폭을 넓히다가 1921년 9월,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는 김우영을 따라 만주로 이주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곳에서 나혜석은 여자 야학을 세워 교육 사업을 하고 독립운동가를 도우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냈다. 그것은 위험을 수반한 일이었으나 친일파로 낙인찍힌 남편을 위해서도 훌륭한 모험이요 내조였다. 그림 그리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아 1922년 6월 첫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서 입선을 하고 이후 수년간 ‘선전’에서 특선과 입선을 반복하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세상을 역류해야 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나혜석의 몫
김우영은 6년간의 부영사 생활을 끝내고 벽지 근무자에게 베푸는 특전을 얻어 1927년 6월 나혜석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두 사람은 신의주, 하얼빈을 거쳐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한 달 만인 7월 19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여성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서구 문화와 문명을 체험하며 배웠다. 스위스에서는 당시 그곳을 유람하고 있던 영친왕을 만나고 파리에서는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이자 천도교 교령인 최린(1878~1958)을 만났다.

그러나 김우영이 나혜석을 돌봐줄 것을 최린에게 부탁한 뒤 법률 공부를 위해 독일 베를린으로 떠나면서 나혜석의 삶은 풍랑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혜석은 자유와 낭만의 도시 파리에서 최린과 급속히 친밀해졌다. ‘정신적 코르셋’을 벗어버리고 여성의 당당한 실존을 주장하는 그에게 그것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세상을 역류해야 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나혜석의 몫이었다.
그해 11월 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그날 밤이 불륜의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다. 파리 유학생들이 나혜석을 가리켜 “최린의 작은댁”이라고 할 정도로 둘의 애정 행각에 관한 소문이 파다했다. 독일에서 소문을 들은 김우영이 파리로 돌아와 최린과의 불륜 장면을 목격한 후 다시는 최린을 만나지 말 것을 요구했을 때 나혜석이 그러겠노라고 답함으로써 애정 행각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부부는 미국을 거쳐 1929년 3월, 1년 8개월 만에 귀국했으나 나혜석이 남편과의 약속을 어기고 최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둘의 관계는 회복할 수 없는 단계로 치달았다. 대공황기에 남편의 수입이 변변치 않자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며 다시 사귀기를 바란다는 나혜석의 편지 내용을 최린이 발설하고, 이 사실이 김우영의 귀에 들어갔을 때 김우영은 배신감과 분노에 몸을 떨었다.
김우영은 결국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거부하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위협했다. 나혜석은 어떻게든 이혼만은 피하고 싶어 사정도 해보고 떼도 써봤으나 김우영의 생각이 완고한 것을 알고 1930년 11월 이혼장에 도장을 찍었다. “2년 후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를 받아내긴 했지만 김우영의 마음은 이미 나혜석을 떠나 있었다. 김우영은 1931년 3월 재혼함으로써 나혜석과 완전히 결별했다. 당시 나혜석과 김우영 사이에는 맏딸 김나열, 김선(12살 때 병사), 김진(전 서울법대 교수), 김건(전 한은 총재) 등 3남1녀가 있었으나 이혼 후 아이들을 만나고 싶어도 김우영과 시집이 가로막아 만나지 못했다.

이혼 고백서, 격렬한 비난 불러
홀로 된 나혜석은 생활의 타개책으로 1933년 2월 여자미술학사를 열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 급기야 대중잡지 ‘삼천리’ 1934년 8월, 9월호에 ‘이혼 고백서-김우영 씨에게’를 발표함으로써 세상을 또 한 번 떠들썩하게 했다. 나혜석은 원고지 150여 장에 달하는 이혼 고백서에서 11년간의 결혼 생활, 최린과의 관계, 이를 알게 된 남편의 협박과 강압으로 인한 이혼 과정 등을 솔직히 고백했다. 또한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면서 정작 자신은 정조 관념이 없는 남성과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것은 나혜석 자신으로는 모든 것의 포기였고 어느 의미에서는 사회에 대한 자학적 고백이었다.
예상대로 이혼 고백서는 부정을 저지르고 이혼을 당한 마당에 무슨 면목으로 그런 것을 써내느냐는 등 격렬한 비난을 불러왔다. 이런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나혜석은 1934년 9월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에 대한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파리에서 강제로 정조를 빼앗고 김우영과 이혼할 때 생활 일체를 돌봐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며 거금을 청구하는 소송이었다. 중추원 참의로 본격적인 친일의 길을 걷고 있던 최린이 소 취하 조건으로 거금을 건네고 나혜석은 돈을 받았다. 하지만 돈을 받는 순간 나혜석은 사회적 신망을 받던 조선의 신여성에서 하루아침에 비난과 멸시를 당하는 일개 ‘화냥년’으로 전락했다. 게다가 작품전 실패, 맏아들의 죽음, 화재로 작품이 소실되는 등 온갖 불행이 겹쳤다.
행려병자의 황망한 죽음
1939년 3번째 연 개인전이 성황을 이루긴 했으나 그것은 나혜석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이후 나혜석은 방황과 유랑을 거듭했다. 수덕사 등 사찰과 양로원 등을 전전했다. 정신착란 증세가 악화되고 몸은 마비 현상을 일으켰다.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발을 질질 끌고 다녔다. 그러던 중 1946년 12월 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행인에게 발견되어 원효로의 시립자제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949년 1월 3일 발행된 관보를 통해 행려 사망자로 처리되었다. 무덤도 알려지지 않고 죽은 날짜도 1948년 12월 10일 하오 8시 30분으로만 기록되었을 뿐 확인할 길 없는 황망한 죽음이었다. 나혜석은 이렇게 사무쳤던 원한을 가슴에 묻은 채 무덤 없는 고혼(孤魂)의 전설이 되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나혜석을 우리 지성사에 복원시킨 이는 미술평론가 이구열이다. 그는 1974년 ‘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발표해 나혜석의 삶과 예술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후 나혜석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구체화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은 나혜석의 작품들을 모은 ‘라혜석: 날아간 청조(靑鳥)’(1981)를 펴냈고, 이상경은 나혜석 작품들을 편집하고 교열한 ‘나혜석 전집’(2000)을 출간했다. 문화적 복권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1995년 나혜석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문화관광부가 2000년 ‘2월 문화인물’로 선정했다.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시는 2005년 나혜석을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를 조성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