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연인과 부부 ⑥] 나혜석은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해방과 성평등의 선각자였으나 세상을 역류해야 하는 고통과 상처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 나혜석과 김우영의 결혼 모습(1920년 4월 10일 서울 정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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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지

 

시대를 너무 앞질러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게 비극

날카로운 총기, 들끓는 예술혼, 사랑을 향한 뜨거운 열정을 모두 지닌 나혜석(羅蕙錫·1896~1948)의 비극은 시대를 너무 앞질러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1913년 3월 진명여고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실이 매일신보(1913.4.1)에 사진과 함께 실릴 정도로 나혜석은 고교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하이틴 스타였다.  나혜석은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17세 때인 191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학과에 입학함으로써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에 이어 국내 4번째 서양화가가 될 자격을 갖췄다. 일본 유학은 나혜석에게 서양미술뿐만 아니라 신여성운동의 이론도 가르쳐주었다. 특히 스웨덴의 여성 사상가 엘렌 케이의 자유연애와 자유 이혼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혜석은 1914년 가을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 3호에 실린 ‘이상적 부인’ 제목의 글에서 “현모양처론은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는 것”이라고 비판함으로써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예고했다. 이후 그의 삶은 여성해방과 성평등을 선구적으로 추구한 선각자의 삶이었다. 영국에 버지니아 울프가, 프랑스에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있었다면, 우리 현대 지성사에선 나혜석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감내해야 했던 고독과 상처는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첫사랑과의 사별, 나혜석이 겪은 비운의 시작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의 첫사랑은 오빠의 친구이자 게이오대 학생 최승구였다. 당시 최승구는 조혼으로 고향에 아내가 있었지만 나혜석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두 사람은 화가와 시인으로 서로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고 공명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지속되지 못했다. 나혜석의 아버지가 얼굴조차 알지 못하는 남성과의 결혼을 나혜석에게 강요하고 최승구의 집안이 나혜석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혼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승구가 폐병에 걸려 요양을 위해 고향인 전남 고흥으로 돌아가자 나혜석은 1916년 4월 최승구를 병문안했다. 그러나 나혜석이 최승구와 헤어진 다음날, 최승구가 세상을 떠났다. 일본에서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 증세를 앓았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있던 1917년 어느 날 오빠 나경석의 친구이자 교토제대 법학부를 졸업한 부산 출신의 김우영(1886~1958)이 다가왔다. 김우영은 나혜석보다 나이가 10살이 많았고 상처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사별한 부인과의 사이에 딸도 있었다. 김우영이 애정 공세를 펼쳤으나 나혜석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당시 나혜석은 이광수와 가깝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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