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중국의 티베트 침공(1950년)과 병합 그리고 티베트인들의 봉기와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1959년)

↑ 1950년 티베트를 침공한 중국 인민해방군

 

‘문화 교류’를 명목으로 티베트를 다녀온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티베트 인권 탄압 문제에 대해 “70년 전 일”이라고 했다. 방중단 단장이었던 도종환 의원은 6월 19일 CBS라디오에서 ‘티베트가 인권 탄압이 심각한 곳인데 왜 갔느냐’는 지적에 대해 1951년 중국의 티베트 병합, 1959년 티베트 봉기 이후로는 인권 탄압 문제가 없었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티베트와 중국 간의 역사적 관계와 중국의 티베트 병합 과정을 살펴본다.

 

티베트가 중국과 교류를 시작한 것은 당나라 시대

티베트는 대대로 신정통치를 해온 역대 ‘달라이 라마’들이 쇄국정책을 펴고 히말라야, 카라코람, 곤륜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으로 오랫동안 세상 밖의 세상으로 존재했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최고의 정치·종교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티베트어로는 관세음보살이라는 뜻이다. 기록상 서양의 이방인이 티베트에 닿은 건 12세기 나바라 왕국의 율법자 벤자민을 시작으로 18세기까지 몇몇 선교사들이 전부였다.

티베트가 중국과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한 것은 중국의 당나라 때였다. 중국이 티베트를 가리켜 지칭한 토번(吐蕃)의 시조는 송첸캄포였다. 토번은 실크로드를 장악, 정복전쟁에 나설 정도로 강력했다. 해발 3700m의 라싸를 수도로 삼고 포탈라궁을 지었으며 인도에서 불교와 문자를 도입했다. 당 태종은 이런 티베트를 부마국으로 삼기 위해 문성공주를 송첸캄포에게 시집보냈다.

당나라 이후 티베트는 초원의 유목세계와 거래했다.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손을 내밀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수장 팍빠를 스승으로 모셨다. 15세기 말에 등장한 다얀 칸이 알타이 산맥 동쪽의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그의 손자 알탄 칸이 명나라의 북경을 위협할 무렵, 티베트에서는 승려 총카파가 신흥 개혁교파인 겔룩파(派)를 창시했다. 겔룩파는 세력이 급성장했다. 1578년 몽골의 알탄 칸이 겔룩파의 지도자 소남 갸초에게 바다 같은 지혜를 가진 스승이란 뜻의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18세기 말 인도 지배체제를 구축한 영국은 19세기 중엽 네팔·부탄을 넘보더니 급기야 1888년 티베트를 공격했다. 청은 영국에 티베트에서의 배타적 특권을 양보하고 명목상의 주권을 지켰다. 때를 기다리던 청조는 영국의 식민지배가 약화된 틈을 타 1906년 티베트 왕(제후)의 지위를 되살리고 한족을 관료로 파견했다. 종교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와 2인자 판첸 라마의 통치권은 박탈했다. 결국 달라이 라마 13세는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인도로 물러났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다음해 청조의 황제 지배체제가 무너졌다. 각 성은 독립 열풍에 휩싸였다. 인도에 머물던 달라이 라마 13세는 인도 총독의 지원 아래 1912년 4월 측근 세력을 티베트의 중심지 라싸에 파견해 한족 관료와 중국군을 축출한 뒤 그해 6월 라싸로 귀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자 1912년 중화민국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가 티베트를 공격했다. 하지만 티베트에 지분을 갖고 있던 영국이 “위안스카이 정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가로막았다. 영국의 개입으로 티베트군은 티베트의 중심지 라싸를 지킬 수 있었다. 중국은 이후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 시달려 티베트를 관심에 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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