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국대안(국립 서울대안) 발표와 반대운동

1946년 7월 13일, 미군정 문교부장 유억겸이 ‘경성경제전문·경성법학전문·경성의학전문·경성사범·경성공업전문·수원농림전문 등을 합쳐 국립 서울대를 신설한다’는 내용의 ‘국대안(국립 서울대안)’을 발표하고, 8월 22일 미군정청 학무국이 법령 제102호로 국립서울대 설치령을 공포하면서 이른바 ‘국대안(國大案) 파동’이 시작됐다. 당초 파동은 학무국이 통합 개편될 해당 학교들과의 충분한 사전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데서 비롯된 논쟁적 성격이 짙었지만 좌익은 “국대안이 고등교육기관을 축소시키고 미국인을 총장으로 기용함으로써 운영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각 교육의 고유성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강하게 반발했다. 논쟁의 성격이 극한 좌우갈등과 반미투쟁으로 변질된 것이다.

좌익은 각 학교에 투쟁위를 조직하고 국대안 철회를 요구하는 반대성명을 속속 발표했다. 사태가 점점 악화돼 11월초부터는 동맹휴학(맹휴)이 타 대학으로까지 확산되자 미군정은 3개월 간 휴교조치를 취하는 식의 강경대응으로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나 1947년 2월 3일 개교가 됐어도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며 맹휴로 맞섰다. 서울대 문리과・법과・상과에 이어 공과대도 개교와 함께 맹휴에 동조하기 시작하고 일부 교수까지 참여한 가운데 맹휴가 다른 대학, 심지어 중학생으로까지 확산돼 전국적으로 57개교 4만여명의 학생들이 맹휴에 휩쓸렸다. 국대안을 지지하는 우익 학생단체들도 생겨나 좌우갈등은 더욱 심화됐고 교정은 선전장으로 전락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자 2월 13일 러치 미 군정장관이 국립 서울대 이사회 이사와 총장 선출에 새로운 방법을 취하라고 지시하고 유억겸 문교장관도 서울대 이사회와 총장을 다시 한국인으로 선출함으로써 국대안 파동은 가라앉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5월 12일 서울대 전교생의 절반인 4956명을 제적하고 전체교수 3분의2에 해당하는 380명을 해임하는 초강수를 던졌다. 그리고 5월 말 미군정이 국대안 수정법령을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수그러들자 미군정은 8월에 대부분의 학생을 복학시켜 국대안 파동을 1년만에 마무리지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