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일본 견외사절단(遣外使節團) 서양을 향해 출항

메이지 초기, 일본에서 가장 유행했던 4자성어는 ‘문명개화’였다. 계몽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1867년)을 통해 문명개화가 널리 알려지면서 일본인들은 변화를 갈구했다. 문명개화는 서양을 모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통옷과 게타(나막신)를 벗는 대신 서양의 신사복과 가죽구두를 신었다. 쇠고기 소비량이 문명의 바로미터라는 말이 퍼지면서 쇠고기 먹기 운동도 펼쳐졌다. 두주불사의 후쿠자와가 쇠고기 국물을 안주삼아 연일 술을 마시자 도쿄 시내에는 샤부샤부 식당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고, 쇠고기 국물냄비는 문명개화냄비로 불리며 장안의 인기상품이 됐다.

1871년은 문명개화의 원년이었다. 단발령으로 촌마게라는 상투가 잘려나간 것도 문명개화를 촉진시킨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무엇보다 서양을 배우자며 대규모 사절단을 해외로 파견한 것이 1871년이다. 11월 12일, 46명의 ‘견외사절단(遣外使節團)’을 태운 배가 요코하마를 출항함으로써 일본의 서양 접근이 본격화되었다. 첫 목적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였다. 단장은 메이지 유신이 있게 한 이와쿠라 토모미(岩倉具視)였고, 이토 히로부미의 모습도 보였다. 59명의 유학생도 함께 머나먼 장도에 올랐다. 갓 출범한 메이지 정부의 최대 외교 현안은 에도막부가 서양 각국과 맺어온 각종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는데 있었다. 조약 개정을 위해 분위기 조성에 나섰지만 미국이 쉽게 법 개정에 응하지 않아 사절단은 결국 서양배우기로 목적을 바꿨다. 이토가 서구문화학습에 대한 뜨거운 의욕을 서툰 영어로 표현했을 때 미국 언론의 호평이 쏟아진 것에 만족해야 했다.

1872년 7월 두 번째 행선지 영국을 방문한 사절단은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체제가 영국을 발전시킨 원동력임을 깨달았다. 특히 식민지를 통해 부국강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미국과 유럽 11개국을 돌며 각국 정상을 만났지만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로부터 들은 국가운영 철학은 인상깊었고 감동적이었다. “약육강식의 현대세계에서는 만국 공법은 따를 것이 못되며 국력과 무력만을 진흥시킴으로써 비로소 대국과 대등한 교섭이 가능해진다”는 비스마르크의 연설은 사절단을 충격에 빠뜨렸다. 사절단은 10개월의 기한이 어느덧 1년10개월로 접어든 1873년 10월이 되어서야 일본으로 돌아왔다. 소국 일본이 문명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한 길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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