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친왕 이은, 56년만의 환국

일제 패망 전까지, 영친왕 이은(李垠)은 일본 천황가의 배려와 도움으로 일본에서도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며 살았다. 감시 속에 있는 허울좋은 황족의 신분이긴 했지만 생활은 만족스러웠고 행동은 모범적이었다. 다만 좀처럼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고 가급적이면 침묵했다. 종전후, 조선의 왕 자리가 당연한 자기 몫으로 생각한 그는 고국행을 원했다. 그러나 일본인 부인 이방자 여사는 귀국을 망설였고, 이복형 의친왕의 옹립을 둘러싼 음모와 알력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무엇보다 이은을 괴롭힌 건 경제적인 어려움이었다. 연합군 총사령부가 황족의 모든 경제적 특권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과도한 재산세가 부과됐고 세비가 중단됐다. 재산세를 내고 생활을 유지하려면 부동산을 팔아야 했다. 도쿄저택과 4곳의 별장, 목장이 그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다, 대지 2만평에 건평이 500평이나 되는 저택은 도쿄에서도 요지 중의 요지였다. 저택은 당시 중의원 의장이자 일본 세이브그룹 회장에 팔렸다. 싯가는 1억수천만엔이었으나 사기꾼의 농간으로 4000만엔만 손에 쥐었다. 외아들 이구는 도쿄저택에서 태어나, 이 저택에 지어진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서 홀로이 숨지는 슬픈 인연을 맺는다. 1947년 10월, 이은은 신분이 격하되어 평민이 됐다.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다.

1950년 2월, 이은은 일본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격동하는 사회정세에 대응하지 못한 채 귀국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며 고민하고 있던 그는 이승만과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었다. 종친인 대통령이 왕인 자신에게 상당한 예를 다할 것이고 어떤 형식이든 본국 귀환에 대해 언질이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에게서 들은 얘기는 “귀국하고 싶으면 돌아오라”는 차갑고 모진 말 뿐이었다. 낙담한 이은은 귀국을 단념했다. 1956년, 미국유학을 떠난 아들의 MIT대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여권이 문제였다. 주일 한국대표부가 이 대통령을 의식해 여권 발급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이은은 일본 정부에 여권 발급을 요청했다. 이는 조선의 황태자가 정식으로 일본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결국 이은은 일본인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실망한 국민들은 그에게서 동정심을 거두었다. 1960년, 이 대통령이 하야한 뒤 귀국을 바라는 편지들이 국내에서 답지했으나 이은은 귀국을 보류하며 사태를 주시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 이은이 돌아왔다. 뇌혈전으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있는 불구의 몸이었다. 1907년 조국을 떠난지 56년만의 귀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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