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조선 최초의 근대인’ 윤치호 사망

그는 한말에서 식민지 시기까지 격동의 한복판을 살았던 조선 최초의 근대인이었다. 단발령이 공포되기 10년 전에 머리를 자르고 양복을 입었으며, 1894년에는 신식결혼과 국제결혼으로 시대를 앞서나갔다. 16세 때(1881년)에는 신사유람단을 따라 일본을 방문, 일찌감치 외국 문물을 접하고, 몇 년 뒤에는 갑신정변에 동조한 것이 문제가 돼 10여 년간 상하이와 미국을 떠돌았다. 망명생활은 그를 세계인으로 만들었다. 상하이에서는 조선인 최초로 남감리교 세례를 받았고 미국에서는 5년간 신학문을 공부했다. 1896년에는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로에는 홀로 프랑스에 머물며 유럽 문화와 프랑스어를 익혔다. 어느덧 일어, 중국어, 영어, 프랑스어까지 구사하게 됐고 1883년부터 간간이 쓰기 시작한 영어일기는 1943년까지 60년간 이어졌다.

독립협회 회장과 독립신문 사장을 겸하고 YMCA 총무와 대한자강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학교를 설립했다는 점에서 그는 독립운동가였고 민족운동가였다. 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것도 학계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좌우명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가 말해주듯 그에게 힘과 실력은 곧 정의였다. 그는 말한다. “섣부른 독립운동보다 실력양성이 중요하다”고. “땅을 팔아서 독립운동 자금을 대주는 것보다 농경지를 매입해 그 땅이 일본인 손에 넘어가는 걸 막는 사람이 더 현명한 애국자”라고. 무장 독립운동가들과는 다른 관점에서 식민통치에 비판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동포에 대한 불신도 뿌리깊었다.

어정쩡한 회색인으로 살았으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혹해지면서 급속히 친일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일제 말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벌이고 이때부터 그에게는 ‘친일파’라는 낙인이 찍혔다. 친일행위만을 부각시켜 그를 단죄할 것인지 여부는 전적으로 현재 우리의 몫이다. 1945년 12월 6일, 이런 윤치호가 80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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