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일 녹색당 주역 페트라 켈리, 연인과 동반 자살한 모습으로 발견

페트라 켈리는 1983년 3월 독일 녹색당이 환경정당으로는 세계 최초로 의회에 진출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다. 녹색당을 창당(1980년 11월)하기 전인 1980년 1월, 켈리는 한 토론장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 무렵 국방장관에게 “서독에 미국의 핵무기 배치를 반대한다”는 편지를 쓴 것이 문제가 돼 예편해야 했던 전직 장성 게르트 바스티안과의 만남이었다. 그는 켈리보다 25살이나 많고 부인과 딸까지 둔 유부남이었지만 켈리의 눈에는 이상형으로 비쳤다. 켈리는 평소에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중년 남자를 선호했다. 전에 동거했던 두 남자도 각각 40세, 20세나 많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불같은 신념에 독립심 강한 혁명투사로 보았으나 실제로는 마음 약하고 예민하다는 것까지 알지 못했다. 특히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했다.

1983년 3월, 바스티안이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켈리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둘은 여가와 일, 정치와 사랑을 병행했다. 공사를 막론하고 켈리 옆에는 늘 바스티안이 있었다. 한 마디 불평도 없이 늘 고분고분한 그를 가리켜 사람들은 ‘사환’이라며 비아냥댔다. 1987년 바스티안이 녹색당을 떠나면서 켈리에게 시련이 시작됐다. 녹색당의 당수이자 얼굴이며 청소년과 젊은층의 우상이었지만 “지나치게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자신을 과잉선전한다”는 비난이 잇따랐다. 결국 당내 반발과 거세진 좌파와의 대립으로 1990년 선거 때는 연방의원 후보 공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1992년 3월 자동차사고로 휠체어와 목발에 의지하게 된 바스티안도 점점 굴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삶에 지쳐버린 늙은이로 변해갔다.

그러던 1992년 10월 19일 늦은 밤, 본에 있는 켈리의 집에서 끔찍한 장면이 목격됐다. 바스티안은 2층 침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에서, 켈리는 침대에 누운 채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바스티안이 본처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고 타자기에는 또 하나의 편지가 치다만 채로 꽂혀 있었다. 경찰은 “10월 1일 바스티안이 켈리를 자신의 권총으로 먼저 사살하고 자신도 방아쇠를 당겨 자살한 것”으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무기 없는 세상, 자연과 함께하는 평화스러운 세상을 위해 싸워 온 두 사람이 그들이 거부하던 폭력적인 방법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켈리에게 광적으로 집착한 바스티안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뒤따랐다”는 게 지인들의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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