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지협(地峽)은 1513년 스페인의 모험가 발보아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이곳을 지나 태평양을 바라본 뒤 비로소 유럽에 알려졌다. 이곳에 운하 건설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이미 수에즈운하 성공으로 이 방면 최고전문가로 알려진 프랑스의 페르디낭 드 레셉스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홍수, 산사태, 열대병 등으로 8년만에 손을 들었다. 불안정한 암반과 험악한 산악지대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탓이었다. 특히 공사중 2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황열병과 말라리아는 최대 복병이었다.
프랑스의 뒤를 이어 20세기 초 최대 모험사업에 뛰어든 것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매년 통행료를 지불한다는 조건으로 콜롬비아와 운하건설 조약을 체결했으나 콜롬비아 의회가 조약을 비준하지 않아 계획에 차질을 빚었다. 그들을 도운 것은 운하건설 무산으로 주요 수입원을 놓치게 된 콜롬비아 내 파나마주(州)였다. 분노한 파나마 주민들이 1903년 11월 3일 콜롬비아로부터 독립하겠다며 들고 일어서자 미국은 은밀히 그들을 도와 잇권을 챙겼다. 미국은 신생 독립국 파나마와 1904년 2월 다시 조약을 체결했다. 4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매년 25만 달러를 내는 대신 운하지대 주권을 미국이 영구히 갖는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황열병과 말라리아를 먼저 퇴치한 공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황열병은 자취를 감췄고 말라리아 발병율은 1906년 82%에서 1912년 11%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 덕에 미국은 난공사를 마무리지을 수 있었고 태평양과 대서양은 하나가 됐다. 1914년 8월 15일, 11년간의 공사 끝에 길이 81.6㎞의 운하가 완공됐다. 뉴욕을 출발해 멀리 남미를 돌아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뱃길이 1만5000㎞나 단축되었다. 산업혁명 이래 가장 힘들었다는 대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