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대표적 친일단체 ‘일진회’ 창립

일제의 한국 병탄에 가장 앞선 친일단체는 일진회이고, 송병준, 이용구, 윤시병 등은 창립의 주역이다. 일진회가 창립되기 전, 세 사람의 행보는 각기 달랐다. 송병준은 김옥균을 살해할 목적으로 일본에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에서 낭인생활을 하고 있었고,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하다 옥살이를 했던 이용구는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된 진보회를 조직·관리하고 있었다. 윤시병은 만민공동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독립협회의 거물이었다.

이들 세 사람의 운명이 하나가 된 것은 1904년의 러·일전쟁이 계기가 되었다. 송병준은 일본군 통역으로 귀국, 윤시병과 함께 친일단체 결성을 꾀했다. 윤시병은 한때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던 출세주의자들을 끌어들였고 송병준은 일본의 지원을 끌어냈다. 그 결과가 1904년 8월 18일 조직된 유신회였다. 이름은 이틀 뒤 일진회(一進會)로 바뀌었다. 초기 활동은 미진했다. 그러나 그 해 12월, 전국 조직망을 갖춘 이용구의 진보회를 매수·통합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진회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했다. 배후에는 일본의 조종과 자문이 있었다.

이미 기울어버린 조선의 운명이었지만 마지막 조선의 숨통을 끊는 데 일진회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한반도를 경유하는 일본군의 북진을 도왔고, 간도의 러시아군을 정탐해 일본군에 알렸다.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도 회원을 동원했다. 송병준은 을사조약 체결 전 “내치·외교권을 일본에 일임해야 한다”는 선언서를 발표하고, 1907년 어전회의에서는 고종의 양위를 주장했다. 격분한 백성들이 이완용의 집을 태우고,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사를 습격해 건물과 기계를 부수고 직원들을 구타했으나 일진회는 끝까지 친일적인 열성을 과시했다. 일진회가 발표한 합방성명서는 지금까지도 일본인이 조선인 스스로가 합방을 원했다고 날조하는 데 좋은 구실이 되고 있다. 일진회는 한일병합 후 해산됐다. 일제에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로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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