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에도 팔자가 있다고 한다. 도굴되지 않은 처녀분인 채로 1400년 이상이나 제 모습을 지켜온 것을 보면 무령왕릉의 첫 팔자는 괜찮았는지 모른다. 충남 공주 송산리고분 5호분과 6호분은 도굴과 발굴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돼 비만 오면 물이 스며들었다. 공주박물관측은 여름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1971년 6월 29일부터 뒤쪽 언덕을 파내려갔다. 7월 5일 한 인부의 삽이 땅속 벽돌 모서리에 부딪혔다. 1450년간 긴 잠에 빠져있던 백제 무령왕을 깨우는 소리였다.
벽돌을 따라 파들어가니 아치형의 벽돌이 나타났다. 무령왕릉 입구였다. 작업을 중단하고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하니 김원룡 국립박물관 관장을 단장으로 한 발굴단이 내려왔다. 7월 8일 오후 4시15분, 발굴단이 돌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한국 고고학계가 두고두고 가슴을 쳐야할 가슴쓰린 순간이었다. 나라가 빈곤해 ‘세기의 대발견’을 감당해낼 인적 인프라가 채 갖춰지기도 전에 눈을 뜬 무령왕의 얄궂은 팔자였는지 모른다. 입구를 뜯어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무덤 지석(誌石)이 눈에 들어왔다. 지석 첫 머리에 새겨진 ‘영동대장군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이라는 글귀를 보는 순간 발굴단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백제 제25대 사마왕과 왕비의 능이었던 것이다. 지석은 무령왕의 생몰 일자를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때까지 삼국시대의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됐지만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유물로 알려준 것은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발굴단이 대략 내부조사를 마치고 무덤에서 나오자 밖에는 구경꾼들과 기자들로 야단법석이었다. 신신당부를 했지만 누군가 안에서 사진을 찍다가 청동숟가락을 부러뜨리는 등 질서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이때 발굴단은 천추의 한을 남길 중대한 실수를 하게 된다. 큰 유물만 대충 수습하고 나머지는 바닥에 엉킨 풀뿌리채 자루에 쓸어담은 것이다. 발굴단은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를 발굴작업을 불과 11시만에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실측도는커녕 발굴 정황마저 기록하지 않았다. 수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발굴 후 있었던 두 차례의 보수로 내부가 기울고 비가 새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후손을 잘못만난 무령왕은 1997년 영구폐쇄돼 다시 땅속에 묻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