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고종 강제 퇴위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지만 1개월 전 실패로 돌아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 일제의 강압으로 고종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이다. 헤이그밀사 사건 후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차라리 당당하게 선전포고를 하라”며 압박했고, 이완용을 불러서는 “황제의 결단을 얻어내라”고 다그쳤다. 이완용은 1907년 7월 6일 어전회의를 열어 황제 스스로 퇴위를 결정하라고 요구했다. 송병준은 “이번 일은 폐하에게 책임이 있으니 도쿄에 가서 사죄를 하든지 대한문 앞에 나가 일본군 사령관에게 면박의 예를 하세요”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토는 사전작업으로 일본군을 동원, 덕수궁 대한문을 밀고 들어가 함녕전을 포위한 뒤 기관총 4문을 설치하고 남산에도 포대를 설치, 긴장 분위기를 조성했다. 7월 12일 일본 총리가 이토에게 한국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라고 통보하자 이완용 일파는 16일부터 연일 고종을 찾아 사태를 수습할 것을 요구했다. 을사조약에 어새를 찍어 조약을 추인할 것, 섭정을 둘 것, 도쿄에 가서 사죄할 것 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퇴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이토의 의견을 들어보겠다며 한발짝 물러섰다. 이토가 조선의 문제라며 고종에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자 고종은 마지막으로 이윤용 등 원로대신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들에게서도 아무런 위안을 듣지 못하자 고종은 “슬프도다. 짐이 왕위에 오른지 어언 44해가 지났노라.… 이에 군대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내용의 황제 조칙을 내렸다. 1907년 7월 19일 새벽 3시였다. 조칙은 분명 퇴위가 아니라 황태자의 섭정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으나 이완용과 이토는 이를 양위로 둔갑시켜 7월 20일 오후 8시에 양위식을 거행함으로써 퇴위를 기정사실화시켰다. 고종이 강제퇴위한 날 서울에는 심한 황사비가 내렸고 백성들은 옷을 적셔가며 “아버지가 없소” 통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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