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6월이 되면서 암살 음모자들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비밀경찰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전황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침 음모에 가담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히틀러에게 접근할 기회가 주어지는 독일 예비군사령관의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히틀러 암살이 그의 어깨에 달려있음을 의미했다.
1944년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는 지금의 폴란드 라슈텐부르크 야전사령부에 있는 히틀러로부터 호출 명령을 받았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시한폭탄을 서류가방에 챙겨 회의실에 들어갔다가 폭발 5분 전 서류가방을 테이블 밑에 놓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폭탄은 정확히 12시42분에 터졌다. 히틀러가 살아있으리라고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폭발이었다. 폭발 장면을 목격한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가 죽었다고 판단하고 베를린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한 회의 참석자가 거치적거린다며 테이블 밑의 서류 가방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으면서 히틀러의 생명은 연장되었다. 히틀러는 약간의 부상만 입었다. 함께 모의하고 폭발 순간을 지켜본 현지 사령부 통신대장은 히틀러가 죽었다고 단정하고 베를린의 음모자들에게 거사 성공을 알렸다. 그리고 그들이 다음 수순을 밟을 수 있도록 사령부 내 통신을 3시간 동안 두절시켰다. 이 때문에 베를린의 음모자들은 히틀러가 죽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알지 못해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 방송국도 접수하지 않은 채 우왕좌왕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에 도착한 뒤 뒤늦게 군대를 동원했으나 이미 실기한 뒤였다.
오후 6시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첫 방송이 나가면서 상황이 역전되었다. 음모자들은 하나둘 체포됐고, 슈타우펜베르크를 포함한 4명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반란 실패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왔다. 고위 장교 8명이 목에 피아노선에 감긴 채 버둥거리며 죽어갔고 5000여 명이 체포되어 200명이 처형되고 나머지는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