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앙드레 말로, 국제의용군 편대장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

작가 앙드레 말로의 삶은 20세기를 관통하는 한 편의 대하 드라마다. 매 순간을 변신과 파격으로 살았고 무모하리만큼 죽음에 초연했다. 젊은 시절(1923년),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캄보디아 앙코르의 한 사원에서 몰래 조각을 훔쳐 밀반출하려다 적발돼 수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1925년 베트남에서 ‘인도차이나’라는 신문을 발간해 제국주의자들을 비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식민정부의 방해공작으로 신문사 문을 닫은 뒤 한동안 중국에서 살았던 기간까지 포함한 약력을 그는 자신의 책에 이렇게 소개했다. ‘식민부 위촉으로 캄보디아 지역 고고학 탐사(1923), 청년 베트남당 중앙위원(1924), 중국 국민당 코친차이나 지부장(1924-1925), 중국 광둥성 민족주의 운동 선전위원(1925).’

그러나 한 저널리스트는 “그의 약력이 사실과 거리가 멀다”고 주장한다. ‘변신술과 거짓말쟁이 습성’이 그를 전설화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아시아의 방랑자였고 고독한 모험가였다. 프랑스 지식인의 상당수가 스탈린에 열광했던 것처럼 그 역시 혁명작가 자격으로 모스크바 작가회의에 참석하는 등 공산당과 가까운 입장을 취했다.

모험으로 가득한 일생 중 가장 돌출했던 순간은 1936년의 스페인 내전 때였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7월 21일 스페인 마드리드로 날아가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전한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마련된 30여대의 비행기는 그를 국제의용군 편대장으로 만들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비행기에 의해 자신의 편대가 파괴될 때까지 7개월 동안 불굴의 용기와 지칠 줄 모르는 의지로 대원들을 독려했다. 자신이 비행기를 조종할 줄 모른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출격할 때도 있었다. 비행기들은 형편없었으나 소련의 원조가 있기 전까지는 파시스트 비행기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2차 대전 때는 ‘베르제르(양치기) 대령’으로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되어 두 번이나 독일군에 붙잡혔다가 운 좋게 목숨을 건졌다. 포탄과 총탄이 쏟아져도 혼자 언덕에 올라 적진을 살피는 모습이 자주 목격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전후에는 “나는 레지스탕스를 통해 프랑스와 결혼했다”며 철저한 프랑스주의자가 돼 공보장관과 문화부장관으로 드골과 진퇴를 함께 했다. 카뮈는 “드골에 붙어먹은 이후로 그는 반항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했고, 좌파는 그를 배신자로 혐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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