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3월 5일, ‘공포정치의 화신’인 스탈린이 한 마디 유언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을 후보군으로 몇몇이 거론됐으나 말렌코프가 가장 유력해 보였다. 스탈린이 죽기 직전까지 2~3년 동안 당과 국가의 공식적인 제2인자였던 데다 국가보안부(KGB의 전신)의 책임자로 공포정치를 집행했던 라벤트리 베리야와도 밀접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탈린 사후 소연방 각료회의 의장 겸 수상으로 선출돼 누구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철의 장막’ 밖에서의 예측과 달리 크렘린 내부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은 베리야가 존재하는 한 누구도 현재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었다.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국가보안부를 통합한 내무부 장관과 제1부수상 자리를 꿰차고 있었고, 장례식의 안전을 구실로 비밀경찰 부대를 모스크바에 끌어들여 다른 간부들을 긴장시켰다. 각 세력은 베리야를 제거하자는 생각에는 이심전심으로 동의했으나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때 말렌코프, 몰로토프, 베리야에 이어 당내 서열 5위에 불과했던 흐루시초프가 몸을 움직였다. 베리야의 제안을 면전에서 두 번이나 거부한 적이 있어 흐루시초프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흐루시초프는 수를 써 말렌코프와 몰로토프 그리고 ‘2차 대전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까지 반(反)베리야 대열에 합류시킨 뒤 6월 16일 각본대로 소련 중앙위원회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영문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한 베리야를 향해 흐루시초프가 포문을 열었다. 다른 위원들까지 나서 베리야를 몰아세우고 있을 때 말렌코프가 슬며시 비밀 버튼을 누르자 옆방에 대기하고 있던 주코프 등 군장성이 들이닥쳤다. 말렌코프는 그제서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소련 각료회의 의장의 이름으로 베리야를 체포할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뒤이어 주코프가 하얗게 질려있는 베리야에게 명령했다. “손을 올리시오!” 권력투쟁 결과는 7월 10일자 프라우다지를 통해 서방세계에 알려졌다. 베리야가 12월 23일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총살됨으로써 바야흐로 흐루시초프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