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2월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격하하는 발언을 하자 모택동은 중국 공산당과 모택동 자신의 신뢰성이 뿌리채 뒤흔들 것을 우려했다. 모택동은 흐루시초프에 심한 분노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1956년 4월 일어난 예술과 지식발전을 위한 일종의 개방운동인 백가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9월의 제8차 중국 공산당 전당대회는 당규약에 명시된 ‘모택동 사상을 당의 최고 방침으로 한다’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는 것은 당원의 의무다’라는 두 조항을 삭제했다. 모택동의 묵인없이는 있을 수 없는 조치였다.
‘명방운동’은 1957년 들어 “알고있는 것은 말하라. 남김없이 말하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는 모택동의 한 발 앞선 발언으로 지식인들을 들뜨게하고 흥분시켰다. 그러나 한껏 고양된 지식인들의 자유 발언 분위기가 체제를 위협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자 모택동이 다시 칼을 뺐다. 반대 세력에 전면적인 공격을 퍼부으며 ’반우파 투쟁‘을 전개한 것이다. 1958년 7월까지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되어 노동개조에 보내지거나 한직으로 밀려났다. 대약진운동까지 파탄으로 치닫는 가운데 1959년이 찾아왔다. 대약진운동의 왜곡을 깊이 우려한 당 정치국원 겸 국방부장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노선 전환을 요구하기로 결심했다.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6·25에도 참전하고 1953년 휴전협정에도 서명한 바 있는 팽덕회는 모택동이 장비에 비유하고 흐루시초프가 ‘천재적인 전략가’라고 할 만큼 직선적이고 전형적인 무장이었다.
1959년 7월 2일 이른바 ‘여산(廬山)회의’라 불리는 당 정치국 확대회의가 여산에서 열렸다. 첫날엔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튿날 팽덕회가 “작년에 무턱대고 하달된 모주석의 의견에는 문제가 적지 않았다”고 입을 열면서 분위기는 한 순간에 돌변했다. 그의 발언은 인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택동의 귀에 속속 들어갔다. 팽덕회는 모택동을 의식하지 않고 8일 동안 7번이나 정책비판을 했다. 7월14일에는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는 편지를 모택동에게 보냈다. 조심스러웠지만 신랄한 편지였다. 팽덕회로서는 은밀한 직간(直諫)이었으나 모택동은 자칫 번질지 모르는 불길의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팽덕회의 반발은 모택동 자신의 위신에 대한 도전이었고 공산당 지도체제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다. 이때 건네받은 편지는 좋은 먹이감이었다.
모택동은 당정치국 상무위원을 여산으로 불러모아 팽덕회와 그의지지 세력들을 몰아세웠고 뒤이어 반당집단을 결성했다는 이유를 들어 직무해임했다. 팽덕회는 끊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었지만 한 개인의 불운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후 중국에는 침묵만이 강요됐고 분위기는 경색되어갔다. 10년간의 대동란 ‘문화대혁명’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서히 배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