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2차대전 발발 후 프랑스·독일, 휴전 조약 체결… 프랑스 자유지역에 비시정부 출범

1940년 6월 14일 파리가 함락되고 6월 22일 ‘베르됭 전투의 영웅’ 필립 페탱이 독일과 휴전조약에 서명함으로써 프랑스는 점령 지역과 자유 지역으로 나뉜다. 파리를 포함한 북쪽의 점령지역은 독일이 직접 통치했고, 온천 지역 비시(Vichy)를 중심으로 한 남쪽의 자유 지역은 독일의 묵인 아래 프랑스인이 세운 ‘비시정부’가 관할했다. 히틀러는 프랑스 전역을 점령하는 데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고, 점령 후에도 직접통치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발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시정부의 등장을 눈감아 주었다.

7월 10일 프랑스 의회가 국가주석이 된 페탱 한 사람에게 전권을 부여하는 개헌안을 569 대 80이란 압도적인 표결로 지지함에 따라 새롭게 출범한 비시정부는 패전 이유가 프랑스 자체 모순에 있다고 보고 소위 ‘민족혁명’을 추진했다. 민족혁명을 위해 개인의 자유주의적 전통 대신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노선이 채택되고, ‘자유·평등·박애’의 국가이념이 ‘노동·가족·국가’로 대체되면서 프랑스는 점차 파시스트 국가로 변모해갔다.

문제는 이 민족혁명이 독일의 강요에 의한 정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비시정부가 자발적으로 내세운 프랑스인의 미래계획안이었다는 점에서 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런던으로 옮겨간 드골의 임시정부만이 합법정부이며 비시정부는 나치의 괴뢰정권’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페탱이 프랑스를 구한 방패 역할을 했다’는 반론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페탱은 독일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일에 지나치게 밀착한 총리를 해임하거나 레지스탕스를 배후 지원하는 등 이중적인 처신을 보이기도 했다. 비시정부는 1942년 11월 독일의 직접 통치지역으로 되었다가 1944년 8월 연합군의 파리 해방과 함께 붕괴됐고, 페탱은 전후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돼 1951년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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