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7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300년 가까이 남·북조 양대 세력으로 분열돼 있던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가 복병 고구려를 만나 30년만에 무너지고, 뒤를 이은 당나라의 패권주의로 여파가 한반도에까지 미쳤다. 당태종은 주변의 이민족을 복속시키고 ‘정관의 치’라는 안정된 평화시대를 정착시켰으나 유독 신속(臣屬)을 거부하는 고구려의 존재가 눈에 거슬렸다. 당시 고구려의 영류왕은 군사기밀을 알리고 태자를 보내 조공하는 등 당나라와의 화치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영류왕이 저자세 굴욕외교로 일관하자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추종 세력들을 축출하고 자신이 실권을 장악했다. 대당 굴욕파에 대한 대당 강경파의 군사정변이었다.
평소 당나라와 고구려 두 천하가 병존할 수 없다고 믿어온 당태종은 고구려의 정치 체제가 급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 당시 중국은 중화사상으로 표현되는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는 자신들이 만주 일대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천하의 주인공이라는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당태종과 연개소문의 격돌은 개인의 충돌이 아니라 각기 다른 세계관·천하관의 충돌이었다. 당태종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로 쳐들어온 것은 645년 3월이었다. 기습공격으로 개모성을 함락시켜 서전을 장식한 당나라군은 서북방 최대 요충지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하면서 기세를 떨쳤다.
6월 20일 당과 고구려의 운명을 건 대회전 안시성(安市城) 전투가 시작됐다. 초반 싸움에서는 상당수의 고구려군이 죽거나 항복해 패색이 짙었으나 60여일 동안 성문을 걸어잠근 고구려군의 결사항전으로 결국 당태종은 안시성을 포기해야 했다. 대회전은 당태종에게 큰 상처만을 남긴 채 연개소문의 최후 승리로 끝이 났다. 당태종은 이후에도 수차례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649년 “고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세상을 떠났다.
고구려는 이후에도 자국의 힘으로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켜냈으나 계속된 국지전에 국력을 소진시켜 쇠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이후 중국 측 기록은 연개소문을 격렬하게 비난하며 적대시하고 주로 중국 측 자료를 통해 연개소문을 바라본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시 연개소문을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중국인들만은 그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4천년 역사에서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소개했던 이가 연개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