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비취 미인대회에 파견할 미스코리아 선발요강.’ 1957년 4월 6일자 한국일보 1면에 큼지막한 신문사고(社告)가 실렸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연다는 내용이었다. 만18세 이상 28세까지의 한국여성으로 흥행단체나 접객업에 종사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게 참가자격이었다. 예선은 5월 2일, 본선은 5월 5일이라고 예고했으나 처음 열리는 대회가 제대로 치러질지 의문이었다.
예상대로 2주일이나 지나도 반응이 신통치 않자 행사 담당자가 직접 뛰어다니며 응모자를 찾았다. 요즘 말로 ‘길거리 캐스팅’이었는데 그래도 호응이 없어 예선·본선 대회를 5월 12일과 19일로 연기해야 했다. 경우 구슬러 접수시켰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다. 다음날 새벽같이 달려와 자신을 빼달라고 울고불고 사정하는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남의 혼인길을 막으려는 수작이냐”는 가족들의 항의도 있었다. 접수를 끝낸 여성은 다음날 신문에 사진과 함께 상세한 기사가 실렸다. ‘00양 응모, 화장은 짙어야 하나요 하는 수줍음…’ ‘춘희(椿姬) 애독한 문학소녀…가냘프면서도 만만한 건강체’ 등.
고희동(화가) 모윤숙(시인) 박화성(소설가) 이해랑(연극인) 등 쟁쟁한 심사위원이 발표되면서 신청자가 늘긴 했으나 대회를 치르기에는 여전히 부족해 예선대회를 또 연기했다. 57명의 신청자 중 서류심사로 뽑힌 20명이 5월 14일의 예선에서 몸매심사와 개별·집단 심사를 거쳐 7명으로 좁혀졌다. 1957년 5월 19일, 마침내 제1회 미스코리아 본선대회가 명동 시립극장에서 열려 이화여고를 졸업한 23세의 박현옥양이 최초의 미스코리아로 뽑혔다. 박현옥은 상금 30만 환과 양단 저고리, 양복지, 은수저 등 12가지의 부상을 받았고 그 해 7월 11일 미국 롱비치에서 열린 ‘미스유니버스’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다. 미스코리아는 1972년 MBC-TV로 생중계되면서 화려한 전성기를 맞았으나 2002년 공중파 TV의 생중계가 사라지고 2004년 본선 심사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영복 심사까지 폐지되면서 서서히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