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을 보필하며 미국의 ‘국가안보’와 동의어로 간주되어온 에드거 후버가 법무부 수사국장에 오른 것은 1924년 5월 10일이다. 당시 수사국에 팽배해 있는 정실주의와 패거리 문화를 근절하라는 것이 29세 후버에게 부과된 임무였다. 후버는 그 무렵 한창 보급되기 시작한 라디오의 효용성을 간파했기 때문에 히틀러와 스탈린처럼 이 새로운 의사소통수단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하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려나갔다. 공산주의자 색출로 주가가 높아지면서 후버의 인기는 여느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았다. 포장기술도 뛰어나 일단 후버의 표적이 되면 시시껄렁한 깡패라도 곧 무시무시한 범죄자로 둔갑했고, 적당한 수사 대상을 고르는데도 수완이 발휘됐다. 그의 활약 덕에 수사국은 1935년 FBI(연방수사국)로 확대 개편됐다.
미국의 2차대전 참전과 함께 위험인물로 간주된 모든 외국인들을 일제히 검거하면서 후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전쟁이 끝나 FBI의 역할이 감소하자 후버는 다시 공산주의자를 향해 촉수를 세웠다. 매카시 의원에게 공산주의자 명단을 제공한 것도 후버였다. 미국인들은 후버가 국가를 대신해 적색분자, 깡패, 나치 동조자, 체제 파괴자 등을 단죄하는 것으로 믿고 후버가 공직자, 군부, 영화배우, 운동선수 심지어 막 태동하고 있는 흑인민권운동에까지 감시의 손길을 뻗쳐도 묵인해주었다.
후버가 결혼도 하지 않고 48년간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밀파일에 있었다. 워싱턴 정가에서 파일은 전설이었고 후버를 지켜주는 든든한 빽이었다. 대통령들은 자신들의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는 후버의 파일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파일을 이용해 정적들에 상처를 주었다. 1964년이 의무 은퇴연령인 70세였지만 파일 덕에 후버는 여전히 국장으로 남아 전권을 휘두를 수 있었다. 분명 대통령은 언제라도 후버를 해임할 수 있었지만 실행에 옮긴 대통령은 없었다. 1972년 5월 1일 그가 죽고나서야 자동 해임됐으니 그 자신이 임명권자였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