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화전문가들이 20세기 최고영화로 꼽는 美 영화 ‘시민 케인’ 개봉

오손 웰스는 10대 시절에 연극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고, 20대 초반에 사람들을 패닉상태로 빠뜨린 라디오 드라마 ‘화성인의 습격’을 만들었던 연극·드라마 연출의 귀재였고 신동이었다.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939년 경영난을 겪고있던 RKO 영화사가 영화연출을 제안했다. 영화 2편을 제작하는데 22만 5,000달러를 주고 영화제작에도 거의 관여않는다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 당시 무명의 영화감독에게 할리우드가 지불한 액수로는 역대 최고치였다. 더구나 당시 오손 웰스의 나이는 25세였다.

웰스가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겨 영화 ‘시민 케인’을 준비하고 있을 때 한 촬영감독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MGM 영화사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그렉 톨랜드였다. 이미 연극을 통해 웰스의 천재성을 알아본 톨랜드는 ‘시민 케인’의 촬영을 자원했고 웰스는 요청을 받아들였다.

웰스가 각본·연출·출연까지 한 영화는 1940년 6월에 촬영을 시작해 1941년 5월 1일 개봉됐다. 신문왕 케인이 ‘장미꽃 봉오리’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는 것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주인공의 야망과 사랑과 부침을 교묘하게 배합시켜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한 기자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구성됐다. 톨랜드는 웰스의 의중을 정확히 파악, 화면의 전경 중경 후경에 모두 포커스를 맞추는 ‘딥 포커스’ 기술을 선보여 훗날 두고두고 영화 교과서에 빈번하게 인용되도록 했다. 비평가들과 언론은 ‘시민 케인’을 격찬했지만 영화의 실제 모델인 언론재벌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스캔들을 소재로 한 영화 개봉을 반가와 할리 없었다. 허스트의 회유와 협박 때문인지 영화는 15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하며 흥행에 참패했지만 영화인들은 ‘시민 케인’을 20세기 최고영화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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