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유미주의(唯美主義)의 대표작가로 위트와 지성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가식을 한껏 조롱했던 천재 문필가 오스카 와일드가 오히려 ‘일그러진 예술가의 초상’으로 지탄 받으며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것은 이성과 동성을 넘나든 성적 취향 때문이었다. 그의 연극과 방탕한 생활에 갈채를 보내던 영국 사교계가 갑자기 그에게 등을 돌리고 파멸로 내몬 것은 ‘와일드는 동성연애자’라는, 공공연했던 비밀이 세상에 알려지면서였다.
37세 와일드와 21세 귀족청년 알프레드 더글러스의 만남은 1891년에 이뤄졌다. 아일랜드 출신에 옥스퍼드대를 나온 와일드는 그 무렵 이미 동화집 ‘행복한 왕자’(1888)와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1)을 출간한 유명 작가였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다. 와일드는 이미 결혼해 두 아들까지 둔 유부남이었으나 더글러스와 함께 극장을 드나들고 여행하며 사랑을 속삭였다. 더글러스는 후세에 남을 만한 변변한 작품 하나 없는 무명시인이었지만 ‘두 사랑(Two love)’이란 시의 한 구절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오늘날 동성애를 에둘러 표현하는 ‘나는 그 이름을 감히 말해서는 안되는 사랑이다’(I am the love that dare not speak its name)가 그것이다. 더글러스와 사귀는 동안 와일드는 그와 비슷한 성적취향을 갖고있던 상류층 인사들과 동성애 금지법 개정을 위해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동성애를 소재로 한 소설도 썼다. 와일드에게는 우정으로 맺어진 여성도 여럿 있었다. 그 중에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도 있었는데, 1879년 사라가 처음 영국 무대에 섰을 때 와일드가 꽃다발을 던지며 “사라 베르나르 만세!”라고 외친 것이 인연이 됐다. 둘의 우정은 깊었다. 1892년 사라의 요청을 받고 쓴 희곡이 그 유명한 ‘살로메’이다.
와일드와 더글러스의 사랑은 더글러스의 아버지 퀸스베리 후작이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불화에 휩싸였다. 1895년 2월, 후작이 ‘남색꾼’이라고 쓴 종이쪽지를 클럽에 놓고 갔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와일드는 모욕감에 분을 참지 못했다. 더글러스가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자신의 아버지를 고소하라고 부추기자 재판이 잘못되면 자칫 동성연애자로 낙인찍힌다는 사실도 잊은 채 와일드는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후작을 고소했다. 동성연애가 중대범죄였던 시대였다.
재판은 1895년 4월 3일 시작됐다. 후작의 준비는 완벽했다. ‘황홀한 키스를 위해 창조된’ ‘애인의 빨간 장밋빛 입술’ 등 더글러스에게 보낸 와일드의 편지가 증거로 제출되고, 런던의 남창(男娼)들까지 와일드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증언이 잇따르자 판사는 “가장 혐오스런 타락의 중심”이라며 와일드에게 징역 2년형을 선고했다. 언론의 비난이 쏟아지고 재산이 압류됐으며 책 출판과 연극 공연이 금지됐다. 아내도 성까지 바꿔 두 아들과 함께 해외로 나가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사라도 면회를 오지 않았다.
와일드는 1897년 5월 19일 석방돼 “다시는 영국을 찾지 않겠다”며 영국을 떠나 프랑스에서 더글러스와 재회했으나 이미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홀로 병마와 싸우다 3년 뒤인 1900년 11월 30일 파리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쓸쓸히 죽었다. 숨지기 수개월 전 만난 사라 베르나르가 그를 위해 울어준 것이 마지막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