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게재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한 자루의 붓으로 오직 일본의 국권신장과 부국강병만을 꾀하며 일세를 풍미했던 계몽사상가였다. 학문에의 길은 1854년 ‘난학(蘭學)’ 공부와 함께 시작되었다. 난학은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알고자 했던 당시 학문의 총칭이다. 1858년, 5년간의 공부로 어느덧 난학의 대가가 된 그에게 10여 명의 무사가 찾아왔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즉 게이오대의 시작이었다.

후쿠자와는 어느날 난학이 더 이상 서양학문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학(英學)’에 매진했다. 영일·일영 사전 한 권 없을 때였다. 이런 그에게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은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을 위해 일본 대표가 워싱턴에 갈 때였다. 후쿠자와는 호위함 제독에게 시종 신분으로 동행을 간청, 허락을 받아냈다.

1860년 1월, 38일만에 도착한 샌프란시스코는 충격이었다. 이때 구입한 영어 사전은 일본 땅에 들어온 최초의 웹스터 사전이었다. 영어를 번역하려면 이에 맞는 일본어를 만들어야 했다. 자유, 권리, 연설, 토론 등의 단어들이 그 무렵 만들어졌다. 1861년, 프랑스, 영국 등 유럽 6개국을 돌아보는 1년 여의 대장정과 1867년, 두 번째 미국행까지 경험하면서 비로소 서양의 실체가 보이는 듯 했다.

존왕양이(尊王攘夷)가 판을 치던 시절,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있었으니 주위 시선이 고울리 없었다. 1862년부터 10여년간 밤 외출을 삼갈 정도로 암살 공포에 시달렸고 실제 암살 시도도 있었다. 구미견문록 ‘서양사정(西洋事情)’(1866년)의 출판은 진정한 후쿠자와의 등장이었다. 20여 만부가 팔려나간 이 책으로 그는 일약 ‘전 일본인의 교사’가 되었다. 뒤이어 나온 ‘학문의 권유’(1872년), ‘문명론 개략’(1875)으로 ‘문명개화의 전도사’로 우뚝 섰다. 1882년에는 민간계도를 목적으로 한 ‘지지신보(時事新報)’까지 발간, 언론까지 영역을 넓혔으나 점차 민권론자에서 국익을 좇는 국권론자로 변신하면서 훗날 지지신보는 제국주의 논리를 가다듬고 이를 집권층에 주입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후쿠자와가 지지신보에 실은 2000여 편의 사설은, 안으로는 격동기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정하는 나침반이었고 밖으로는 자국의 국권팽창을 주장하는 나팔수였다. 1885년 3월 16일, 지지신보에 실린 ‘탈아론(脫亞論)’이야말로 중국·조선에 대한 후쿠자와의 생각이 거리낌없이 드러난 사설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의 일원에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과 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악우(惡友)들과 친할 경우,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아시아 동방의 악우들을 사절해야 한다.’ 물론 악우는 중국과 조선을 말한다. 이처럼 탈아론이 일제 대외침략의 이론적 발판이 된 것은 분명하나 당시 중국과 조선이 여전히 미몽 상태였다는 사실까지 간과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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