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日 계몽운동가 후쿠자와 유키치 ‘탈아론(脫亞論)’ 논문 발표 

↑ 후쿠자와 유키치

 

학계와 교육계에서 일본의 야심을 뒷받침하는 토대 마련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는 오직 한 자루의 붓만으로 근대 일본의 국권 신장과 부국강병을 꾀하며 일세를 풍미한 계몽사상가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권력을 탐하지도 권력에 굴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정계에서 대일본제국의 건설을 위해 매진했다면 그는 학계와 교육계에서 일본의 야심을 뒷받침했다. 수차례의 입각 요구도 거절한 채 지식층 육성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후쿠자와는 나카쓰번(현재의 오이타현 나카쓰시)의 하급무사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학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당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난학’이었다. 난학은 네덜란드(화란·和蘭) 서적을 통해 서양을 알고자 했던 당시 일본 내 서양 학문의 총칭으로 후쿠자와는 1856년 난학을 처음 접하고 1858년 에도(도쿄)에 난학숙을 열었다. 하지만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로 미국의 문물이 들이닥치면서 난학은 더 이상 서양의 대표 학문이 될 수 없었다. 후쿠자와는 1859년 다시 ‘영학(英學)’에 매진했고 그 덕에 견문을 넓힐 기회를 손에 쥐었다.

후쿠자와는 미일수호통상조약 비준차 미국 워싱턴으로 가는 견미사절단의 시종 신분으로 1860년 1월 미국 땅을 밟았다. 그에게 샌프란시스코는 충격이었다. 후쿠자와는 귀국할 때 웹스터 영어사전을 가져와 일본어로 번역하려 했으나 마땅한 일본어가 없었다. 그래서 만든 용어들이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자유, 권리, 연설, 토론 등이다.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을 돌아보는 견구사절단의 일원으로 1861년 1월부터 1년여 경험한 유럽 대장정도 그에게 서양의 실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두 아들과 두 조카까지 각각 미국과 유럽으로 유학을 보낼 정도로 이미 19세기의 코스모폴리탄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천황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시대였다. 서양 문물을 앞장서 소개하는 그를 주위에서 좋게 보지 않았다. 1862년부터 10여 년간 밤 외출을 삼가해야 할 정도로 암살 공포에 시달렸고 실제 그를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렇다고 학문을 중단하거나 뜻을 굽힐 후쿠자와도 아니었다. 1868년 4월 에도의 난학숙을 개편해 게이오의숙(현재의 게이오대)을 열고 사농공상의 차별 없이 양학에 뜻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받아들였다. 1866년부터는 자신의 문명관과 정치관을 드러낸 역저들을 속속 발간했다. ‘서양사정’(1866~1869), ‘학문의 권장’(1872~1876), ‘문명론의 개략’(1875) 등 3부작은 당대에만 각각 수십 만부나 팔려 근대 지식의 수용과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탈아론’은 동아시아 패권주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논설

후쿠자와는 1882년 민간 계도를 목적으로 일간지 ‘시사신보(時事新報)’를 창간해 언론으로까지 관심 영역을 넓혔다. 시사신보는 그가 점차 민권론자에서 국익을 좇는 국권론자로 변신하면서 제국주의 논리를 가다듬고 이를 집권층에 주입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후쿠자와가 시사신보에 게재한 2,000여 편의 논설은, 안으로는 격동기 일본 근대화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이자 밖으로는 자국의 국권 팽창을 주장하는 확성기였다. “조선인은 미개한 백성으로 매우 완고하고 오만하며 포악하다. 중국인은 겁이 많고 나약하며 비굴하고 무례하면서 거지 같다”며 지독한 민족적 멸시관을 드러낸 것도 시사신보였다.

1885년 3월 16일자 시사신보 1면에 실린 ‘탈아론(脫亞論)’은 동아시아의 패권주의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논설이었다. 후쿠자와는 탈아론에서 ▲서양 문명은 ‘홍역’이 유행하는 것처럼 막을 방법이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주의는 ‘탈아’이다. ▲일본에 불행한 점은 근린의 중국·조선이라는 국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문명이 밀려오는데 중국·조선은 변혁을 거부하고 옛것에 집착하고 있다. ▲중국·조선은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3개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후쿠자와는 1887년 1월 시사신보에 일본을 지키는 방위선으로 조선을 이용해야 한다는 논설을 발표했다. 한 나라가 이익선을 잃어버리면 주권선이 위태로워지고 이익선을 얻으면 주권선이 안정되므로 이익선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대외 정책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즉 주권선은 일본의 영토 방위를 뜻하고 이익선은 주권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전략 요충지를 뜻한다. 후쿠자와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맞서 조선을 일본의 이익선으로 상정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시사신보를 통해 국민의 전쟁임을 역설하며 의연금을 모집하고 전장에 특파원을 파견했다. 호외도 수시로 발행, 전승 분위기를 일본 전역에 고양했다.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일전쟁이 일단락되었을 때는 ‘조선은 득의양양하게 마음껏 욕구를 채우고도 지칠 줄 모르는 중국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 성적으로 방종한 여자’라고 야유하는 논설을 썼다. 1901년 2월 3일, 66세로 눈을 감았을 때 유언대로 부의금, 조화, 생화 등 일체 없이 소박하게 치러진 장례식에는 1만 5,000여 명이 운집해 애도 물결을 이뤘다. 오늘날 일본의 1만 엔권 지폐에 후쿠자와의 초상화가 올라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 대한 일본인의 생각이 어떤지를 쉽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조선의 청년들과도 교분 나눠

후쿠자와는 조선의 지식인들과도 교분이 깊었다.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지상명제로 삼고 있는 조선의 개화파 청년들을 잘 활용하면 큰 희생 없이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킬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먼저 그는 유길준이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1881년 5월 일본을 방문했을 때 게이오의숙에 입학시켜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유길준은 게이오의숙이 받아들인 첫 외국인으로 기록되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머릿말에서 “남들이 이야기한 찌꺼기만을 주워 모았다”고 실토할 만큼 후쿠자와가 저술한 ‘서양사정’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서유견문의 출판사도 후쿠자와가 설립한 ‘교슌사’였다.

후쿠자와는 1882년 임오군란의 사죄사로 방일한 박영효도 적극 후원했다. 박영효가 후쿠자와의 식견에 감탄하고 후쿠자와가 조선에도 시사신보 같은 신문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 탄생한 것이 조선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였다. 후쿠자와는 박영효의 귀국길에 자신의 제자인 우시바 다쿠조와 신문기술자 이노우에 가쿠로고를 동행케 해 ‘한성순보’를 1883년 10월 발행하게 하는 등 조선 개화파의 후견인을 자처했다. 그러다 보니 한성순보의 사설에는 청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이 강조되고 일본의 영향력 증대를 시도하는 내용이 많았다.

후쿠자와의 손때는 1884년의 갑신정변 곳곳에도 묻어 있다. 배후에서 정변을 기획하고 지휘한 것도, 정변 실패 후 김옥균의 탈출을 도운 것도, 망명객을 반겨 맞은 이도 후쿠자와였다. 갑신정변이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했을 때는 시사신보를 통해 일본의 무력 개입을 강력히 촉구했다. 일본에서 김옥균의 애를 낳은 일본 여성도 후쿠자와의 하녀였을 만큼 김옥균은 후쿠자와에게 크게 의존했다. 춘원 이광수는 후쿠자와를 가리켜 “하늘이 일본을 축하해 내린 위인”이라며 그 자신 ‘한국의 후쿠자와’를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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