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일본 패잔병, 30년 만에 필리핀 정글에서 발견

“명령이 없으면 산에서 내려갈 수 없다.” 29년 4개월을 산속에서 보낸 사람의 첫 마디는 이랬다. 1974년 2월 20일, 그를 찾아나선 스즈키라는 일본인 청년과 필리핀 루방섬에서 조우했을 때 오노다 히로(小野田寬郞) 전 일본 소위가 했던 말이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오노다가 조국을 떠나 멀리 루방섬에 배치된 것은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4년 9월이었다. 미군의 진격에 대비해 전략 정보를 수집하는 게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투항하지 말라”는 직속상관의 명령을 아로새기며 루방섬에 상륙(1945년 3월)한 미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에는 패퇴해 250여 명 중 40여 명만 살아남아 정글로 도주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항전을 거듭하다가 차츰 패전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부분은 투항했으나 오노다 소위와 3명의 사병들만 더 깊은 정글로 숨어들었다. 1950년 1명이 투항하고, 1954년과 1972년 나머지 2명마저 필리핀군에 사살되어 혼자가 됐으나 오노다의 의지에는 굽힘이 없었다. 미군이 일본의 항복 사실을 알리는 전단을 산속에 뿌리고, 일본 정부와 가족 역시 수 차례 현지를 방문해 투항을 권고했지만 오노다는 여전히 일본의 패전 사실을 믿지 않았다. 멀리서 가족들을 보았을 때도 미군의 공작에 의한 조작이라며 만나지 않았다니 이쯤되면 정신상태를 의심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다가 일본이 오노다의 요구대로 과거 직속상관에게 구 일본군의 투항명령문을 딸려보내 하산을 유도하자 오노다는 3월 10일 루방섬 필리핀 공군기지에서 필리핀 공군사령관에게 일본도를 넘겨주며 정식으로 항복했다. 발견 당시 머리는 일본군 규칙에 따라 짧게 깎여 있었고 복장은 단정했으며 소총은 반짝반짝 손질되어 있었다. 항복한 그날밤 오노다는 30년 동안 매일 적은 루방섬 정찰 및 전투일지를 과거 상관에게 보고했다. 3월 12일, 22세 청년에서 52세 중년으로 변해버린 오노다가 귀국했을 때 일본 국민들은 “일본 군인정신의 부활”이라며 열광하고 우익들은 “일본정신 즉 ‘야마토다마시(大和魂)’를 굳게 지킨 영웅”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2년 전 1972년 2월 괌의 정글에서 숨어지내다 발견된 요코이 쇼이치 하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발견 당시 요코이가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이나 군인으로서의 긍지를 모두 잊어버린 그저 겁에 질린 한 인간일 뿐이었다”며 당시의 두려움을 표현해서인지 국민들은 오노다에 더 관심을 쏟았다. 물론 요코이와 달리 오노다가 장교이고 그의 기행이 뭇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구석이 있었던 것도 주요 이유였지만 오노다와 달리 요코이가 총검을 녹슬게 했다는 사실도 두 사람을 비교하는데 작용되었다. 귀국 후 두 사람의 대담이 추진되었을 때 요코이는 승낙한 반면 오노다는 거부했다. 천황으로부터 받은 물건을 녹슬게 하는 자와는 대담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오노다는 1975년 10월 브라질로 이주했다. “전후의 일본에서 과거의 일본적 가치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한 ‘일본적 가치’라는 게 이처럼 사리분별없고 맹목적인 명령과 복종이었다면 일본식 군국주의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이해될 법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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