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KNA 여객기, 북한 공작원에게 피랍되어 북으로 끌려가

1958년 2월 16일 부산 수영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대한민국항공사(KNA) 소속 DC-3기 여객기 ‘창랑호’가 12시 40분경 경기도 평택 상공에서 무장한 북한 공작원들에게 피랍되어 북으로 끌려갔다. 비행기에는 승무원 4명을 포함 34명이 탑승해 있었으나 이 중 7명은 북한 공작원들이어서 순수 탑승객은 27명이었다. 탑승객 중에는 유봉순 당시 민의원과 공군 정훈감 김기완 대령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 대령은 훗날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김대중 납치사건(1973년 8월) 때 도쿄 주일대사관에 근무하며 김재권 공사 직함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납치범들은 탑승객 중 군인 2명의 머리를 망치로 내리쳐 실신시킨 뒤 칼빈총과 엽총을 기내 앞뒤에서 발사하면서 조종사를 협박해 기수를 평양으로 돌리도록 명령했고, 창랑호는 휴전선을 넘어 오후 2시경 평남 순안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다. 피랍 초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던 북한은 때마침 평양을 방문하고 있는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에게 KNA가 의거납북한 것처럼 보이기위해 대대적인 선전을 펼쳤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적십자사와 군사정전위를 통해 탑승객 송환과 기체반환을 강력히 요구했다. 20일부터는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규탄대회가 열려 154개소에서 63만 명이 참가했다.

결국 북한은 자유세계의 여론에 굴복, 피랍 18일만인 3월 6일 간첩으로 지목된 7명과 유아1명을 제외한 26명을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당초 탑승객은 오전에 송환될 예정이었으나 판문점 회의에서 북한의 국호 문제로 우리 정부 내에서 옥신각신 하다가 그날 밤 7시로 늦쳐졌다.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사 총재 앞으로 인수증을 쓰라고 요구하자 북한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북한의 국호를 받아들이지 않던 우리 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받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ROK(Republic of Korea)’였지만 북한은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가 아니고 단순히 ‘공산괴뢰’일 뿐이었다. 우리정부가 입장정리를 못하고 우왕좌왕하자 미국은 “왜 호칭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느냐”며 한국 사람은 빼고 북한과 협상하겠다는 입장을 보여 우리 정부는 할 수 없이 북한의 국호를 인정해야 했다.

피랍된 탑승객 가운데는 미국 조종사 1명을 포함 미국인이 2명, 독일인이 2명 있었다. 검찰은 사건 배후로 기덕영 등 3명을 간첩죄 등으로 구속기소하고, 기덕영은 8월 5일 서울지법에서 강도 등의 혐의로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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