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일어났다. 정당마다 처한 입장에 따라 충격이었고 좌절이었으며 환호였다. 서울 종로․중구 합동연설회에 10만의 군중이 모였을 때, 그리고 개표 전 잠정 집계된 투표율(최종 집계 88.9%)이 역대 총선사상 두 번째로 높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이미 사태를 예견해야 했다. 1985년 2월 12일, 유난히 추웠던 그날 한국 민주주의의 작은 씨앗이 꽁꽁 얼어붙은 땅에 뿌려졌다. 선거가 끝나고 TV로 개표상황을 지켜보던 국민들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선거혁명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절대 권력이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3차해금이 2개월반 전에야 이뤄져 창당 1개월도 안돼 선거에 뛰어들어야 했던 신민당(신한민주당)이 67석(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의 의석수를 차지한 것이다.
여당인 민정당이 4년 전 11대 선거 때보다 5석만 줄어들었을 뿐 신민당의 2배도 넘는 148석이나 차지했는데 웬 호들갑이냐고 하겠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결코 간단치 않다. 35.2%(민정당) 대 29.4%(신민당)가 말해주듯 전국 득표율이 근소한 차이를 보인 데다 서울과 부산에서는 오히려 신민당이 43.3%와 36.9%를 획득, 민정당의 27.3%와 27.9%를 압도했다. 민정당은 서울의 14개 선거구에서 13명을 당선시켰으나 2명만 금메달 당선이었을 뿐 11명은 은메달 당선이었다. 4년 전 금메달 12개, 은메달 2개인 것과 비교하면 정반대 결과였다. 민심이 그들을 떠나고 있다는 징표였다.
반면 신민당은 서울 전 지역구 당선에 12명이 금메달 당선이었다. 당시 선거제도는 1개 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 중선거구제였다. 4년 전 전지역 당선 그것도 금메달이 5개나 됐던 부산은 더욱 심각했다. 6개 선거구 중에서 3명만 당선됐고 금메달은 한 명 뿐이었다. 이같은 저조한 성적에도 민정당이 전국구 92석 가운데 61석이나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1당이 전국구를 사실상 독식하도록 한 당시 선거법의 마술때문이었다. 2·12총선이 가져다준 또 하나의 충격은 11대에 비해 47석이나 줄어든, 제1야당이면서 관제야당이었던 민한당의 몰락이었다. 선거후 신민당은 민한·국민당 당선자를 영입해 103석을 확보함으로써 명실공히 민정당·신민당 양당체제를 만들었다. 이후 2·12총선이 뿌린 씨앗은 2년 뒤 1987년 6월항쟁과 직선제를 담은 ‘6·29선언’으로 자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