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독일 나치 고위인사들의 반제회의… 유대인 대량학살의 일상화

↑ 친위대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왼쪽)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1월 20일 아침, 독일 베를린 근교 반제가(街)의 한 저택(암그로센반제 56–58번지 별장)에 나치의 차관급 인사 13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초대로 이뤄진 조찬회동이었다. 하이드리히와 친위대 소속 아돌프 아이히만까지 포함하면 이른바 ‘반제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15명이었다. 회의 시작 전,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 권한이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와 자신에 있음을 상기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유럽 내 1100만 유대인을 동부로 이주시켜 강제노동시키면 상당수의 유대인이 자연도태될 것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살아남는 유대인들은 저항력이 있는 자들이므로 이들을 석방하면 유대인의 르네상스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분명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유대인 절멸’이 안건으로 상정된 회의였지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표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회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이의제기와 토론도 없었다. 굳이 대량학살, 독가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참석자들은 나치의 언어에 익숙해 있었고,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미 강제수용소에서 독가스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제회의’ 후부터 홀로코스트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반제회의가 무엇이기에 지금까지도 독일의 교과서에 실려 그들의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반제회의 후 ‘유대인 절멸’이 사실상 나치의 공식적인 뜻으로 확인되고 대량학살이 죄의식 없이 일상화된 데 있었다. 식사 후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 국장 뮐러 그리고 아이히만만이 남아 만족스러운 듯 코냑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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