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이야기

유대인 학살을 히틀러 정권 차원에서 공식화한 ‘반제 회의’ 열려

↑ 친위대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왼쪽)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독일 베를린 근교 반제가(街)의 한 저택(암그로센반제 56–58번지 별장)에 나치의 차관급 인사들이 모여든 것은 1942년 1월 20일 아침이었다. 훗날 ‘반제 회의’로 불린 조찬 회동의 주재자는 나치의 친위대 산하 제국보안국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그의 직위는 아돌프 히틀러, 서열 2위의 헤르만 괴링, 그리고 자신의 직속상관인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힘러의 지시만을 받는 요직이었다.

그가 유대인 학살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39년 제국보안국 국장 자리에 오르면서였다. 악명이 높은 비밀경찰(게슈타포)도 제국보안국의 제4국에 속할 만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제국보안국은 친위대 내에서도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실질적 사령탑이었다. 하이드리히는 1941년 7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아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학살을 담당한 살인특무부대도 지휘했다.

하이드리히 역시 자신의 직속 상관 힘러처럼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였다. 히틀러가 가는 곳에 항상 힘러가 있는 것처럼 힘러가 움직이는 곳에는 언제나 하이드리히가 동행했다. 이런 밀착 관계는 하이드리히가 1942년 5월 영국에서 잠입한 체코 출신 비밀 요원에게 암살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런던에 본부를 둔 체코 망명정부는 체코인으로 7인의 특공대를 조직해 하이드리히 암살을 지시했다. 특공대는 1942년 5월 27일 아침 프라하성으로 출근하는 하이드리히가 탄 벤츠 오픈카에 수류탄을 던졌다. 하이드리히는 수술 끝에 6월 4일 사망했다. 이 암살을 소재로 한 영화가 ‘새벽의 7인’(1975)이다.

반제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15명이었다. 하이드리히와 1명의 참석자를 제외한 13명은 내무부, 법무부, 외무부, 총리 비서실 등 각 부처에서 2~3번째 서열의 차관급이었다. 1명의 참석자란 회의록을 작성한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그는 직급으로만 따지면 보잘 것 없는 인물이었다. 나치가 몰락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오른 최고 계급도 친위대 중령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 가운데 어떤 방식으로든 그의 손을 거친 사람이 절반에 달한다고 할 만큼 그가 유대인 대학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컸다. 아이히만은 폴란드 동부 지역에 절멸수용소를 세우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유대인 희생자가 몇 명인지를 알고 있는 나치 내 소수 사람 가운데 한 명이었다.

 

홀로코스트를 정권 차원에서 공식화한 회의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권한이 친위대 사령관 힘러와 그의 수임자인 자신에게 있다는 말로 회의를 시작했다. 뒤이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문제와 직접 관련된 모든 중앙부처의 긴밀한 협조가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두 가지였다. 독일 국민의 생활공간에서 유대인을 몰아내는 것과 다양한 생활 분야에서 유대인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회의에서는 또한 “유럽 내 1,100만 유대인을 동부로 이주시켜 강제 노동시키면 상당수의 유대인이 자연도태될 것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살아남는 유대인들은 저항력이 있는 자들이므로 이들을 석방하면 유대인의 르네상스가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회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했다. 이의 제기와 토론도 없었다. 관계 부처의 차관급 인사들은 하이드리히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거나 약간의 의견만 개진한 후 그가 제기한 방향을 그대로 수용했다.

반제 회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유대인 절멸’이 안건으로 상정된 회의였는데도 유대인 절멸에 관한 중대한 결정은 없었다. 그런데도 반제 회의는 오늘날 독일의 교과서에 실려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중요한 회의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유대인을 남김없이 절멸시킨다는 나치 고위층의 공식적인 결정 사항에 대해 ‘지휘선의 단일화’와 ‘독일 생활권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유대인을 청소하는 것이 대학살의 목적’이라는 것을 실무 책임자들끼리 이심전심으로 분명하게 확인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굳이 대량 학살, 독가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참석자들은 나치의 언어에 익숙해 있었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반제 회의는 홀로코스트를 정권 차원에서 공식화했다는 데 역사적인 중대성이 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