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박정양 초대 주미공사, 미 대통령에 신임장 제정

↑ 박정양

 

1882년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조선 주재 미국 공사가 5번이나 교체될 때까지 조선은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비용도 비용이었지만 청국의 트집이 미국행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1887년에 이르러서야 박정양과 심상학을 각각 주미, 주유럽 전권공사로 임명했으나 청국의 반대는 여전했다. 조선에서 상전 노릇을 하던 원세개는 “청국과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절계획을 백지화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미국의 항의가 있고서야 마지못해 공사파견을 허락했지만 “조선 공사가 주차국에 가면 먼저 청국 공사를 찾아보고 그의 지도로 외무부에 함께 부임해야 하며, 중대사건이 있을 경우 반드시 청국 공사와 미리 협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당시 청국의 압력이 얼마나 셌던지 심상학은 병을 이유로 유럽 전권공사직을 사임했고 후임자 역시 홍콩까지 갔다가 왕명도 기다리지 않고 임의로 귀국해 귀양길을 떠나야했다.

박정양을 비롯 이완용, 이상재 등 모두 10명으로 구성된 최초의 주미 공사단이 일본에서 미국인 의사 호레이스 알렌과 합류한 뒤 요코하마를 출항한 것은 1887년 12월 10일이었다. 14일간의 항해 끝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나 입국 첫날부터 문제가 생겼다. 선객 중에 두창 환자가 생겨 이민국이 상륙을 허가하지 않은 것이다. 1주일 동안 갇혀있다 미국 땅을 밟은 것이 1888년 1월 1일이고 워싱턴에 도착한 것이 1월 10일이다. 미 대통령과의 접견을 기다리던 중 청국 공사가 시비를 걸어왔다. 사절파견을 허가할 때 청국이 내걸었던 조건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박정양은 청국을 통하지 않고 단독으로 미 정부와 교섭에 나서 1888년 1월 17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이때 박정양은 대통령이 이미 접견실로 들어왔으나 평범한 복장의 대통령을 알아보지 못하고 화려한 복장의 대통령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실수를 범했다. 이 사실을 알고는 큰 결례를 했다는 마음에 떨면서 신임장을 읽어나갔다. 청국의 시비는 계속 이어졌다. 청국 공사가 본국으로 일일이 박 공사의 독단행동을 보고하면 본국의 이홍장은 이를 한양의 원세개에게 훈령으로 보냈고, 원세개가 이를 조선 정부에 따지면 조선 정부는 다시 박정양에게 힐책하는 식으로 괴롭힌 것이다. 결국 박정양은 부임 1년만에 본국으로 송환되는 신세가 됐다.

박정양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분이 덜풀린 원세개가 그에게 사약을 내리라고 주장하는 통에 박정양은 4개월 동안 일본 땅에 머물러야 했다. 귀국 후에도 남대문 밖에서 70여일 동안이나 기다리다 1889년 8월 20일 어렵게 고종에게 결과를 보고할 수 있었다. ※신임장 제정일이 1월 17일이라고 쓴 이 글을 본 한 인사가 “미 국무성 기록에는 우리 공사단이 신임장 제정일로 통보받은 것이 1월 18일”이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그래서 우리 외교통상부에 문의하니 “외교통상부는 1월 17일을 신임장 제정일로 삼고 있다”고 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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