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99.9%는 나를 지지하고 있다.” 팔레비 이란 국왕은 수십 년간 이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럴만한 것이 그가 통치하는 동안 이란은 세계 강대국으로 비상하고 있었다. 풍부한 석유를 바탕으로 경제는 급성장하고 군은 최첨단 장비로 현대화됐다. 동서냉전의 지정학적 위치 덕에 미·소 양국으로부터는 부단한 경의가 쏟아졌다. 그의 꿈은 과거 페르시아 대제국의 영광을 되살리는데 있었다. 1963년 국가개혁을 기치로 백색혁명을 시작한 이래 토지는 재분배됐으며 도로·철도·항공망이 확장됐다. 문맹율은 90%에서 60%로 떨어졌고 여성에겐 투표권과 이혼권이 주어졌다. 낙타국가가 공업화된 군사기술강대국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짧은 기간에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성취하려한 과도한 의욕이 문제였다. 특히 수백 년 동안 대지주였던 이슬람 성직자들로부터 땅과 특권적 지위를 빼앗은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 근대화로 인해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성직자들이 팔레비 왕가의 중요한 적대 세력으로 발전하자 팔레비는 기존 세력을 분쇄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개혁을 실현시키기 위해 탄압 노선을 채택했다.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언론을 탄압했으며 비밀경찰 사바크를 동원해 반대 목소리를 잠재웠다. 게다가 급격한 공업화는 농촌을 황폐화시키고 인플레를 유발시켰다. 친·인척들도 부정·부패로 부를 쌓아 민심 이반을 부채질했다. 국민들이 서구에서 수입한 근대적 발전이라는 팔레비의 슬로건에 점점 환멸을 느낄수록 이슬람적 생활이념을 되찾자는 호메이니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정부가 근대화를 선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이슬람 성직자에 의지했다.
1964년 11월 터키로 추방된 후 이라크에서 사색과 설교로 살아가던 호메이니는 사실 국민들에겐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팔레비의 악정이 더욱 노골화되면서 호메이니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 속을 파고들었다. 1977년 11월 호메이니의 아들이 이라크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민심은 급격히 반(反) 팔레비로 쏠렸다. 저항을 누르면 용수철처럼 튀어오기를 1년여. 많은 사람들이 신음하며 죽어갔다. 믿었던 군도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미국 조차 망명을 권유했다. 1979년 1월 16일, 수십 만 군중이 여전히 반팔레비 구호를 외치고 있을 때 보잉 727기가 테헤란 상공 위를 날아올랐다. “긴 휴양을 떠날 것”이라는 공식담화를 남긴 채 팔레비가 황급히 이집트로 도망친 것이다. 그가 떠나고 30분 뒤 라디오에서 이 소식이 흘러나오면서 전국에는 환희의 폭풍이 몰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