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이 체결되고 3개월이 지난 1906년 1월 29일, 고종이 벽안의 더글러스 스토리를 만났다. 스토리는 일본에서 을사조약 체결의 전말을 듣고 1906년 초 부임하는 일본 통감부 총무장관을 따라 한국에 들어온 영국 트리뷴지 특파원이었다. 고종은 ‘을사조약에 조인·동의하지 않았다’는 붉은 옥쇄가 찍힌 밀서를 스토리에게 전달했고, 스토리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제물포항을 빠져나가 2월 7일 중국에서 밀서내용을 기사로 작성, 영국 본사에 송고했다.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 신세다. 을사조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로 시작하는 스토리의 기사가 6개항의 밀서내용과 함께 2월 8일자 트리뷴 3면 머릿기사로 실리자 로이터통신은 기사를 받아 한국의 실상을 세계 각지에 알렸다.
기사는 한국과 일본 신문에도 실려 평소 “을사조약은 한·일 양국이 자발적으로 합의한 것”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을 곤혹스럽게 했다. 국권을 찾기 위한 고종의 노력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을사조약 체결 전 1905년 2월에는 러시아 육군 소장 데시노를 통해 러시아 황제에게 원조를 요청하는 밀서를 보냈고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 11월에는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에게 “짐은 총칼의 위협과 강요아래 최근 한일양국간에 체결된 소위 보호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한다”는 친서를 건네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게 전달하게 했다.
1907년에는 역시 헐버트를 통해 일본과 미국을 제외한 9개 강대국 국가원수들에게 ‘을사조약 무효선언문’을 전달하려다 실패했고, 1907년 6월에는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3명의 밀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세계에 알리려했다. 그러나 밀사 외교의 실패는 고종이 감내해야 했고, 결과는 7월 19일의 강제퇴위로 이어졌다. 또 통감부의 여론통제 빌미로도 작용돼 이후 대한매일신보 등 항일 민족지에는 알게 모르게 탄압이 가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