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1월,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닉슨은 곧바로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올 궁리에 골몰했다.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의 전비가 퍼부어지고 54만 명이나 되는 미군이 파병될 정도로 미군의 개입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지나치게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철수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TV와 신문에서는 연일 베트남전의 비참한 전투 장면이 반복 보도되고 있었고, 반전여론은 미국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적인 이슈로 확산되고 있었다.
닉슨 정부는 이같은 반전여론과 베트남의 부정부패를 구실로 삼아 철수방안을 모색했다. 미국과의 정면 대결이 결코 승산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월맹(북베트남) 역시 미국 내 반전여론을 틈타 국면전환을 꾀했다. 미국은 월맹과 협상을 추진하는 한편 미국만을 바라보고 있는 베트남을 설득했다. 방위조약을 체결해 베트남군을 지원하고 월맹이 휴전협정을 파기하면 즉각 북폭을 재개하겠노라고. 결과적으로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73년 1월 27일, 이같은 배경 아래 파리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됐다. 하루빨리 수렁에서 발을 빼고 싶어하는 미국, 북폭과 경제봉쇄로 더 이상 전쟁수행 능력을 상실한 월맹의 입장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협정에는 미국·베트남·월맹·베트콩(남베트남 해방전선) 등 네 전쟁 당사자와, 휴전을 감시할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 대표가 서명했으나 회담장 문을 나서는 대표들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미국·월맹·베트콩 대표는 미소를 지은 반면 베트남 대표는 침통한 표정이었다. 협정에 따라 미군은 60일 이내에 철수했고 포로들은 석방됐으며 1954년 제네바협정 때 확정된 북위 17도선은 여전히 군사분계선으로 남았다. 그러나 베트남에 있던 월맹군 15만 명은 ‘증원만 하지 않으면 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미국의 양보로 베트남 곳곳에 그대로 남아 ‘표범무늬 휴전’이라는 말도 나왔다. 협정 주역 키신저는 휴전 체제가 적어도 10년은 갈 것으로 기대했으나 불안한 평화는 2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