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영국 선박 11척 호주 시드니 도착… 30년 뒤 ‘호주의 날’로 제정

↑ 영국 해군 대령 아서 필립과 군인들이 1788년 1월 26일 호주 시드니 지역에 정착해 영국 국기를 올리는 모습(출처 위키피디아)

 

호주는 영국의 군인이자 항해사였던 제임스 쿡 대위가 1770년 4월 20일 호주 동부 해안에 처음 도착하면서 서양에 존재가 알려졌다. 당시 쿡과 동행했던 인물 중에는 식물학자들도 있었는데 그곳에서 채집한 귀중한 식물 표본들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들이 도착한 만(灣)에 보타니(Botany·식물학)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또 쿡은 보타니만이 있는 대륙의 동쪽 지역을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명명했다.

당시 영국은 많은 수의 죄수들을 식민지 미국으로 보냈는데 1776년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고 1783년 미국에서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한다는 내용의 파리조약이 체결되어 더 이상 죄수들을 미국으로 보낼 수 없었다. 넘쳐나는 죄수들로 감옥이 부족해지자 제임스 쿡의 친구이자 그와 함께 호주 대륙을 탐험했던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는 정부에 뉴 사우스 웨일스의 보타니만을 미국 대신 죄수를 유배 보낼 수 있는 지역으로 제안했다. 그는 이곳이 원주민들이 공격할 가능성이 작고, 농사를 지을 만한 녹초 지대가 있으며, 무엇보다 유럽인들이 정착한 다른 대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져 1787년 1월 죄수들의 뉴 사우스 웨일스 유배가 결정됐다. 그곳을 통치할 총독으로는 아서 필립 해군 대령으로 결정되었다. 필립은 남녀 죄수와 군인, 선원 등 1500여명의 사람과 함께 11척의 배를 나눠 타고 1787년 5월 13일 출항했다. 그리고 약 8개월 뒤인 1788년 1월 18일~20일 보타니만에 닻을 내렸다. 그러나 보타니만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배를 육지에 정박하는 데 적당하지 않고 식수 확보도 마땅하지 않고 땅도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뱃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약 12㎞ 떨어진 포트 잭슨을 며칠간 살펴본 뒤, 그곳이 살기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곧 함대 본진도 1788년 1월 26일 이곳으로 이동해 닻을 내린 뒤 필립 총독은 자신을 그곳까지 오게 한 영국 내무장관 시드니경의 이름에서 따 ‘시드니’로 불렀다. 그후 뉴 사우스 웨일스의 주지사가 이 1월 26일을 국경일인 ‘호주의 날’로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818년이었다.

1790년 죄수들을 실은 두 번째 배가 도착하고, 이어 새 땅에서 새 삶을 가꾸려는 사람들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속속 몰려와 호바트(1803년), 브리즈번(1824년), 퍼스(1829년), 멜버른(1835년), 아델레이드(1836년) 등이 새 정착지로 잇따라 개발되면서 이들 6개 식민영토는 1850년 영국 정부에 의해 자치정부로 승격됐다. 현재의 호주 연방제가 탄생한 것은 1901년 1월 1일이다.

‘호주의 날’은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들에게는 뜻깊은 날이지만, 호주 원주민들에게는 정반대 의미가 있다. 이들에게 호주의 날은 영국인이 75만여 명이나 되는 원주민의 존재를 무시하고 호주 대륙을 차지한 ‘침략의 날’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주민들은 영국인의 호주 개척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다. 우선 이민자를 통해 수두 등 전염병이 들어오면서 90%에 가까운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호주 정부는 ‘원주민 동화 정책’과 ‘문명화 정책’을 통해 원주민 어린이들을 부모에게서 강제로 빼앗아 백인 가정이나 선교 기관에 위탁하기도 했다. 최근엔 이런 역사를 고려해 호주의 날을 첫 의회 개회일(1901년 5월 9일) 등 정치적 논란이 덜한 다른 날짜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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