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폭탄을 만들어 ‘소련 수폭의 아버지’로 불리던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젊은 날은 탄탄대로였다. 1947년 26세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수소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특별그룹의 일원으로 뽑혀 과학적 능력을 인정받은 사하로프는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키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32세로 소련 과학아카데미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됐고, 레닌훈장과 노동자영웅훈장 등을 받았다.
이렇듯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이 가시밭길로 들어선 것은 1957년,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껴 ‘반핵(反核)’을 제창하면서였다. 그의 ‘반핵 선언’은 한계를 모르고 치닫던 미·소 간의 핵 대결에는 제동을 걸었으나 그의 앞날에는 험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하로프는 1960년대를 가로지르며 냉전 청산, 인류의 평화공존을 줄기차게 외쳐댔다. 그리고 1968년 오랜 지적·도덕적 방황과 사색을 청산하고 결단을 내렸다. 긴장완화 전, 소련의 민주화가 선행요건이라고 주장한 에세이 ‘진보, 평화공존, 지적자유에 관한 고찰’이 소련 지하 문학지 사미즈다트를 거쳐 7월 2일 뉴욕타임스지에 발표된 것이다. 그가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자 소련 정부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계기로 사하로프는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1970년 11월 4일, 저명한 지식인들과 함께 발족한 소련 인권위원회는 본격적인 인권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사형제 철폐와 정치범 사면을 요구하는 호소문 발표(1971년), 소련사회의 민주화가 수반되지 않는 동서데탕트는 잘못(1973년),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정치범들을 위해 관심가져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 발표(1977년) 등 이 ‘행동하는 양심’은 1970년대를 관통했다. 1975년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지만 소련 정부의 출국 불허로 부인 엘레나 보너 여사가 수상을 대신해야했다. 관영 타스통신은 “노벨평화상이 ‘인민의 적’ 사하로프에 수여됐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10년 넘게 계속되던 소련 정부와의 위태로운 관계는 1980년에 드디어 파국을 맞았다. 그해 1월 22일 체포와 동시에 볼가강변 고리키로 강제추방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