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같은 혁명투사’ ‘피에 굶주린 로자’, 찬사와 비난이 함께 한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9년 1월 15일, 혁명동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살해되어 독일 베를린의 리히텐슈타인 다리 강물 속으로 내던져졌다.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태어나 오직 혁명적 사회주의 만을 추구해온 48년의 세월이었다. 구 동독은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동독이 문을 닫을 때까지 기념해왔다.
150㎝밖에 안되는 작은 키에 다리까지 절었던 로자 룩셈부르크가 망명지 스위스에서 박사학위를 마치고 독일로 건너간 것은 1898년, 27살 때였다. 사회민주당을 분열로 몰고간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에 뛰어들어, 민주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이단’이라고 공박하며, 마르크스 이론대로 노동 대중의 폭력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러시아혁명에는 열렬한 지지를 보냈지만, 레닌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추종 세력들을 중심으로 관료적 레닌주의를 구축하자 레닌까지 비판하며 당의 권력독점을 경계했다. 레닌으로부터 ‘대중 추수(追隨)주의자’라는 비판을 들을 만큼 로자는 노동자 계급의 자발성을 신뢰했고 혁명성을 기대했다.
그 무렵 독일은 1차대전 패전으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을 이어갈 첫 번째 서방국가로 지목될 만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고,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이 폭동을 일으켜 베를린을 비롯한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사민당에서 노선 차이로 뛰쳐나온 급진좌파들로, 중심에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가 있었다. 하지만 군의 강경 진압으로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고, 로자 룩셈부르크도 체포되어 이날 비참한 최후를 맞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