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9년 12월 20일, 조광조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숨졌다. 38세였고, 관직에 몸담은지 5년째였다.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이 성리학의 토대 위에 유교적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조광조를 중용한 것은 시대의 소명이었다. 전임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하고 파괴된 유교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중종과 조광조의 공통된 목표였다.
사간원을 거쳐 사헌부의 대사헌에 오른 조광조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있었다. 먼저 착수한 것이 현량과 설치. 과거제의 폐단을 없애려면 인재를 천거해 뽑아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사실은 기득권층이 장악하고 있는 구질서를 과감히 흔들어놓자는 심산이었다. 왕실에서 일월성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관청인 소격서가 폐지된 것도 조광조가 거둔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조광조의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는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와 곳곳에서 마찰을 일으켜 수시로 충돌이 빚어졌다. 중종도 상소를 일삼는 조광조의 개혁에 요즘말로 ‘개혁피로 증후근’에 시달렸다. 265차례의 소격서폐지 상소 등 거의 3∼4일에 한 번꼴로 상소하는 조광조를 어느 왕인들 달가워했을까. 반정세력 즉 쿠데타 성공세력 가운데 그의 탄핵상소를 받지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위기의식을 느낀 훈구파는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자를 새겨 벌레가 파먹게 하고는, 민심인 것처럼 조작해 조광조를 견제했다. 주(走)와 조(肖)를 합한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것이다. 1519년 10월 마침내 어느 한쪽도 피할 수 없는 한판승부가 시작됐다. 반정공신(反正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가 그것이었다. 주특기인 상소로 반정을 주도한 공신 117명 중 76명의 훈작을 삭탈할 때만해도 조광조의 개혁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훈구파의 역습이 없을 리 없었다. 결국 4일 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조광조 등 관련자들이 처단됐다. ‘탁월한 개혁가’였을까 ‘실패한 이상주의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