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5월 11일 저녁 8시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밤길을 걷고 있던 한 사내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에 체포되었다. 지난 10년 간 리카르도 클레멘트로 행세해온 ‘마지막 해결사’ 루돌프 아이히만이었다. 그는 2차대전 중 나치 친위대 장교로 독일과 독일의 점령지에 있는 유대인을 체포·고문·강제이주·살육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숫가에서 열린 이른바 ‘반제 회의’에도 참석, 유대인 절멸을 의미하는 ‘최종 해결책’을 결정한 15명 멤버 중 한 명이었을만큼 홀로코스트에 드리워진 그의 그림자는 짙고 넓었다. 아이히만은 전쟁 후 미군에 잡혔으나 이듬해 수용소를 탈출, 이탈리아와 중동 등지에 머물다 1950년 아르헨티나로 잠입한 후 그곳에서 신분을 감추고 기계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열흘간 심문을 받고 5월 21일 자의에 의해 이송된다는 각서를 쓰고 이스라엘로 보내졌으나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아르헨티나의 항의로 한때 양국 간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됐다.
세계가 주목하는 가운데 1961년 4월 11일 시작된 재판은 독일인 변호사가 제기한 문제들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변호사는 납치는 국제법 위반이고 나치 전범 처벌을 위해 1950년 제정된 법은 사후 입법이므로 형벌 불소급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으로 아이히만 재판은 ‘법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드라마의 하나’로 평가될 만큼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다. 아이히만도 “나의 전 생애는 칸트의 실천이성에 따라 살아왔다”며 “나는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나치라는 거대한 기계에서 톱니바퀴처럼 작은 일 밖에 하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이후 114회의 재판이 열리고 판결문을 읽는 데만 3일이 걸린 끝에 1961년 12월 15일 마침내 선고가 내려졌다. 사형이었다. 이듬해 5월 29일 대법원이 사형을 확정함으로써 아이히만은 5월 31일 자정 교수형에 처해졌다. 올가미가 목에 걸리기 전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를 외친 아이히만은 사형 참관자들에게 “우리들은 얼마 안 있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라는 여운을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