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여수 14연대 반란

1948년 10월 19일 밤8시쯤. 전남 여수 주둔 제14연대 연병장에 2500여 명의 장병들이 모여있었다. 이윽고 “경찰을 타도하자”는 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의 구호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퍼졌고 장병들이 “옳소!”하며 호응했다. 반대한 3명의 하사관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5개월 전 향토경비대로 창설된 14연대는 이튿날 제주 4·3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평소 경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장병들은 이미 군 내에 침투해있는 공산당 지하조직의 선동으로 반란 분위기에 휩쓸렸다. 더구나 당시의 군은 미군정의 남로당 해산령을 피해 군에 입대한 좌익들에 의해 이미 적화돼 있었고, 남로당은 군을 정치투쟁의 공간으로 활용하려 했다.

무장한 장병들이 여수시내로 뛰쳐나간 시간은 20일 새벽 1시20분쯤이었다. 오전에 여수경찰서를 포함 관공서·은행까지도 그들 손에 넘어갔고 거리는 온통 인공기로 물결쳤다. 인민재판소는 경찰, 국군장교, 지주, 우익인사들을 처형했다. 이때 숨진 경찰만 500명이나 됐다. 오전8시 반란군은 열차를 타고 북상해 그날밤 순천을 장악했다. 뒤이어 광양 곡성 구례 고흥 등도 반란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정부는 22일 계엄령을 선포, 가까스로 순천을 탈환했지만 여수는 강력하게 저항했다. 두차례의 진압작전이 모두 실패하자 26일에는 6척의 바닷가 경비정에서 대대적인 포격을 가하며 상륙을 시도했다. 27일이 되어서야 9일 동안의 14연대 반란사건은 겨우 진압됐으나 이 과정에서 2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2800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고 주한미군의 철수도 연기됐으며 군내 좌익들도 일제히 척결됐다. 도망친 반란군은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며 6·25를 맞았다. 한국전쟁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고 리허설이었다. 전쟁은 사실상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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