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고종, 황제로 즉위

1895년 갑오경장 때 왕을 황제로 격상시키려다 러시아·프랑스·미국 등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조선의 실권이 청(임오군란 후)에서 일본(청일전쟁 후)으로, 다시 러시아(아관파천 후)로 요동치는 현실에서 아직은 때가 일렀는지 모른다. 대신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적 자각을 불러일으켜 독립문 건립운동을 촉진시켰다.

황제로 칭한다는 ‘칭제(稱帝)’가 다시 거론된 것은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 2월) 때였다. 신하들의 부추김도 있었지만 고종 자신도 황제로 불리길 원했다. 1897년 2월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한 고종은 각료들이 그에게 제위에 오르도록 진정하면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여 황제에 오르는 방식으로 열강들의 반대를 비껴가는 전략을 고안해냈다. 1897년 5월 정부관료, 각도 유생, 시정 상인 등 각계각층에서 황제즉위촉구 상소가 빗발친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어느정도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열강들도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자 고종은 8월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바꾸고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할 원구단 축조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1897년 10월 12일 오전 2시, 야심한 밤에 원구단에 올라 제위(帝位)에 오름을 하늘에 고함으로써 황제가 됐다. 이튿날에는 황제 나라에 걸맞게 국호도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더 이상 열강들의 내정간섭을 받지않겠노라는 의사 표시였으나 그는 힘이 없는 황제였고 시대도 황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13년간 연명하다가 1910년에 문을 닫았으나 후세 학자들은 대한제국의 실체를 놓고 상반된 평가를 내리고 있다. “황제권 강화로 광무개혁을 추진하고 민국사상을 펼쳤다.” “아니다 황제 칭호를 갈망한 고종의 허영심만 채웠을 뿐 썩은 왕조의 다해가는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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