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10월 대구 폭동 시작

1946년 9월의 대구는 고질적인 식량난과 미군정에 대한 불만, 거기에 콜레라까지 만연하면서 민심이 흉흉했다. 여기에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9월 총파업’ 결정은 건초더미에 불을 붙힌 격이 됐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청은 아침부터 몰려든 1000여 명의 부녀자들로 북적거렸다. “시청에 가면 쌀을 준다”는 유언비어를 믿고 온 사람들이었다. 오후들어 불어난 시민·학생들은 어느덧 7000여 명을 헤아렸다.

거리를 가득 메운 군중이 밤 10시 통근시간이 지났는데도 해산하지 않자 경찰이 위협사격을 가하며 해산을 종용했다. 놀란 시위대가 뿔뿔이 흩어지면서 시위가 끝났는가 싶었으나 다음날 “경찰이 총으로 한 노동자를 쏴 죽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사태가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악성 유언비어도 난무했다. 차도를 막고 연좌 데모를 벌이는 학생 시위대에 노동자들까지 가세하면서 군중은 어느덧 1만여명을 훌쩍 넘어섰고 이 와중에 발포한 경찰의 총격으로 18명이 사망했다.

피를 본 시위대가 경찰서 안으로 돌진하자 경찰들이 달아났다. 붙잡힌 경찰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무기를 탈취한 시위대가 대구 시내 전역을 돌며 도지사 관저나 파출소를 습격하는 등 폭동화하자 저녁 6시를 기해 미군정이 대구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2대의 탱크까지 동원해 사태수습에 나섰다. 곧 공공기관이 탈환되고 군중도 해산했지만 시위는 대구 주변지역으로 계속 확산됐다. 호남과 중부지방·제주도 등지에서 발생한 폭동은 11월 중순까지 이어져 곳곳에서 경찰서가 습격을 당하고 공무원들이 린치를 당했다. 10월 폭동에 대한 정확한 피해 상황을 집계한 자료는 없지만 각종 증언들을 종합하면 폭동 참가자가 전국적으로 230만 명에 달하고 사망자가 수천을 헤아렸다. 대구에서만 경찰 54명이 숨지고 2만여명의 시위대가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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