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언론인 최석채 필화사건

임병직 주미 대사가 대구에 갔을 때, 아침밥도 못먹고 동원된 학생들이 뙤약볕에서 몇시간이고 기다렸다가 잠깐동안 수기를 흔들고 돌아온 것이 발단이었다. 당시에는 관행이었지만 대구매일 최석채 주필의 눈에는 묵과할 수 없는 권력의 횡포로 비쳤다. 1955년 9월 13일 최석채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권력을 질타했다. 교육당국은 꿀먹은 벙어리였으나 자유당 경북도당 검찰부장 홍영섭 등은 9월 14일 괴청년 40여 명을 이끌고 신문사에 난입, 인쇄시설을 부수고 발송 중인 신문을 빼앗았다.

언론계와 야당이 항의했으나 치안당국은 “백주(白晝)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오히려 사설이 북한 방송에 인용됐다는 이유를 들어 9월 17일 최석채에게 국가보안법을 씌워 구속했다. 최석채는 30일 간의 옥고를 치러야했지만 이것이 인연이 되어 중앙 언론계로 진출하게 됐고, 대구매일 역시 부수가 크게 늘었다. 결국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무죄임이 밝혀졌지만 그는 언제나 자유당 정권에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는 서울로 올라와 이력서 한 장 내지않고 사령장조차 받지 않은 채 ‘유령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서 소리소문없이 사설을 썼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전국이 들끓고 있을 때 최석채는 언론인으로서 예의 기개를 또 한 번 펼쳤다. 3월 17일자 사설 “호헌 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를 쓰고는 잠적한 것이다. 그리고 4월 19일, 그는 데모 군중 속에 있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그를 ‘세계 언론자유 영웅(Press Freedom Hero)’의 한 사람으로 선정, 생전에 언론자유에 끼친 그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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