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은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를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였다. 일본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에서 정통으로 성악을 공부했지만 순수 성악 만으로 생계와 품위를 유지하기에는 당시 우리나라의 문화적 토양이 너무 척박했다. 돈많은 남성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백만장자 아들 이영문과의 염문설이 신문에 보도되자 연인 김우진으로부터 절연장이 날아들었다.
김우진은 호남 대지주의 아들로 이미 결혼까지 한 몸이었지만 도쿄 유학시절 윤심덕과 사랑을 맹세했던 와세다대 출신의 엘리트였다. 윤심덕은 충격을 잊기 위해 1년 여동안 만주를 유랑한 뒤 도쿄로 건너갔고, 김우진도 소리없이 목포의 집을 나와 도쿄로 향했다. 잠시 다녀오겠다며 목포집을 떠날 때 그는 어린 아들을 안고 유난히 서러워했다.
일본에서 두사람 간의 상처가 거의 아물 때 쯤, 윤심덕은 오사카의 닛토레코드사에서 24곡의 노래를 취입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이바노비치의 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를 붙힌 ‘사(死)의 찬미’도 그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보름‘뒤 1926년 8월 5일자 조선일보에는 ’미성(美聲)의 주인 윤심덕양 청년문사와 투신정사(投身情死)‘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윤심덕의 자살 소식이었다. 전날밤 11시에 시모노세키를 출발, 부산으로 향하던 부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새벽 4시쯤 대마도 앞바다를 지날 즈음, 윤심덕과 김우진이 함께 차가운 현해탄에 투신자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