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독일이 자랑하는 암호작성기 ‘에니그마(ENIGMA)’의 암호체계를 풀기 위해 과학자들을 런던 근교 블레츨리 파크에 불러 모았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막 수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27세의 앨런 튜링도 소집 대상이었는데 그 역시 조국의 부름에 흔쾌히 응했다. 튜링은 1936년에 ‘계산 가능한 수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쓰고 1937년에 이 논문을 근거로 현대 컴퓨터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튜링 기계’를 수학적으로 고안해낸 ‘천재 수학자’였다.
튜링이 암호 해독에 매달린 결과 1943년 12월, 2400개의 진공관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 ‘콜로서스(Colossus)’가 완성됐다. 콜로서스는 초당 5000자의 암호문이 종이 테이프를 타고 들어오면 에니그마의 암호와 일치할 때까지 암호를 비교하는 방식으로 암호를 풀었다. 에니그마의 암호 체계에 마침내 구멍이 뚫린 것이다. 독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이 사실을 모른 채 전쟁을 치렀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이르러 본격적인 가동을 시작한 콜로서스는 독일의 거의 모든 비밀통신을 헤집으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콜로서스는 전후 30년이 지난 1975년 10월 영국 정부가 사진을 공개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이 덕에 ‘최초 컴퓨터’의 영예는 한동안 에니악이 차지했다. 전쟁 후 튜링은 오늘날의 인공지능 컴퓨터에 해당하는 ‘생각하는 기계’ 연구에 몰두했으나 곧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곤경에 빠졌다. 법원은 집행유예 1년과 함께 지속적인 여성 호르몬 투입을 결정했고, 이 때문에 튜링은 발기불능과 중추신경계 손상 특히 유방이 나날이 부풀어 오르는 신체 변화에 괴로워했다. 결국 1954년 6월 7일 청산가리를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