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오늘

백정들의 권익 수호 위한 형평사 창립

백정(白丁)은 이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였다. 그들은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분명 해방된 존재였지만 사회적인 차별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장가를 가도 상투를 틀 수 없었고,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같은 고상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반인과의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 함께 살지도 못했다. 호적에는 도살업자를 의미하는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이 표시돼 자식에게까지 차별이 세습됐다.

이같은 차별로부터 벗어나 자신들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시작된 곳은 경남 진주였고, 때는 1923년 4월 25일이었다. ‘형평사(衡平社)’가 발족된 것이다. 5월 13일 발기식을 가진 형평운동은 진주 백정 이학찬과 백정 출신이면서도 일본 메이지대까지 유학하고 온 장지필이 주도했다. 이학찬은 상당한 재산가였음에도 자녀들이 학교 입학을 거부당하고 간신히 입학한 학교에서도 심한 차별을 받자 형평운동에 뜻을 두었고, 장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등본에 자신의 출신 성분이 ‘도한’으로 기록돼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창립식 첫날 참석자는 80여 명이었지만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의 후원 덕에 세가 빠르게 확산되고 여론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역류도 거셌다. 창립 한 달만인 5월 24일 수 백명의 진주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판매하는 고기에 대해 불매·불식(不食)운동을 벌였고, 8월 14일에는 1만 여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건물을 3일 동안 파괴해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다.

그럼에도 형평사는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사로 늘어나고 5년 뒤에는 회원수가 9600여 명으로 불어나는 등 성장세를 보였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회원이 3만 4000여 명(형평사 측은 40만 명으로 추산)이나 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조직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내분으로 1931년 제9회 정기대회에서 해소 건의안이 제출되면서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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