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박스

한미 수교 140주년 기념해 미국에서 열리는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展>… 그의 공사 부임(1888년) 전후로 살펴본 구한말 한미 관계사

↑ 초대 주미 조선공사관 직원들.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하영, 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 이헌용, 강진희, 이종하, 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

 

by 김지지

 

미국 워싱턴DC 시내에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2022년 10월 11일 ‘초대 주미공사 박정양, 자주외교의 기틀을 닦고 한미 우호의 길을 열다’란 제목으로 한·미 수교 140주년 기념전을 시작했다. 1887~1888년 조선의 첫 전권공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조선을 계속 속국으로 두려는 청의 강한 압박 속에서도 자주 외교의 길을 걸으려 했던 박정양(1841∼1905)과 후임 공사들의 행적을 재조명하는 전시는 2023년 4월까지 계속된다. 박정양의 초대 주미공사 부임(1888년) 전후에 이뤄진 한미 관계사를 알아본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관심을 보인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조선과 미국의 첫 접촉은 1853년 1월 29일 미국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호’가 부산 용당포 앞바다로 표류하면서 이뤄졌다. 부산의 관리들이 배에 올라 심문했으나 “며리계” “며리계”만 반복적으로 들릴 뿐 무슨 얘기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오늘날 전문가들은 조선 관리들이 “아메리카”에서 ‘아’자를 듣지 못하고 ‘며리계’로만 들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원들은 배에서만 머물다 1853년 2월 8일 조선을 떠났다.

조선 땅을 처음 밟은 미국인은 미국 포경선 ‘투 브러더스호’에 타고 있던 4명의 선원이었다. 그들은 선장의 횡포에 시달리다가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해 표류하던 중 1855년 7월 2일 강원도 통천 해안가에 상륙했다. 조선 관리들이 의사소통을 시도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서울을 거쳐 북경으로 보내졌다. 그들은 상해 주재 미국영사를 만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1866년 6월 24일에는 당시 문헌에 ‘사불(士佛)호’로 기록된 미국 상선 ‘스쿠너 서프라이즈호’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선원 8명이 평안도 철산부 선천포 해안에서 구조되어 청국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 일도 있었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다가 대동강에서 불에 탄 이른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1866년 8월 16일(음력 7월 7일)이었다.

이후 10년 동안 잠잠하던 미국이 다시 조선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876년 조선·일본의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였다. 미국의 로버트 슈펠트 제독이 부산에 도착, 그곳 일본영사를 통해 교섭을 원한다는 국서를 조선 조정에 전달한 것은 1880년 5월이었다. 조선이 거부하자 미국은 청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럼에도 조선 조정은 미국을 포함해 서양과 조약을 체결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188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가지고 온, 일본 주재 청국공사관의 외교관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을 고종이 읽은 후, 미국을 ‘영토 욕심이 없는 양대인(洋大人)’으로 인식하면서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고종은 청국의 비호 하에 미국 등 우호적 국가들과 수교하면 조선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물이 1882년 5월 22일 미국의 슈펠트와 조선의 전권대신 신헌이 제물포에서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서양 국가와 처음 체결한 통상조약은 긍정·부정의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체결 과정에서 중국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고 조약 체결 후 미 정부의 조선 정책이 불개입·친일 정책으로 일관해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당시 청국이나 일본이 서구 제국과 맺은 조약에 비해 불평등이 약화된 주권국 간의 쌍무적 협약이고 조선·청국 간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를 청산하고 주권독립국가로 새롭게 출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박정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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